<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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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눈을 뜨니 열 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머리맡의 시계를 보면서이제 당분간은 내가 이 시간까지 잠잘 수 없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대강 옷을 챙겨 입고 용인으로 갔다.써니는 화사하게 화장을 한 얼굴이었다.
『친한 간호사 언니가 있거든.내 이야기를 듣더니 화장품을 빌려줬어.그 언니 말은 네가 나를 기억할 때…예쁜 얼굴이 떠올라야 한다는 거야.』 바람은 여전히 쌀쌀했지만 우리는 병원의 뜰을 약간 걷기도 하였다.
『올해는 봄이 일찍 온다고 텔레비전 뉴스에서 그러던데….』 봄이 오면 뭘해…나는 속으로만 말했다.
써니는 다른 때처럼 병원에서의 일상을 주로 말했다.먹으면 기운이 빠지고 졸음이 오는 약을 먹는 척하면서 숨기는 이야기… 밤이면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는 하다가 입에 재갈이 물린 아줌마 환자 이야기….
『나 그만 가야겠어.오늘은 정리해야 할 일들이 좀 남아 있거든.』 『나…말구두…?』 써니가 말하고는 방긋 웃었다.농담처럼들으라는 뜻인가 보았다.
『들어가봐…편지할게.』 써니가 면회실이 있는 건물 입구에서 내 손을 잡고 구석진 곳으로 가더니 혀를 조금 내밀었다.루주를묻히지 말고 키스하라는 건가 보았다.나는 써니의 혀끝에 입을 맞췄다.써니는 아직 환자였다.
써니가 입고 있던 내 코트를 돌려주었고 내가 써니의 어깨를 토닥였다.
『됐어…이젠 들어가.』 써니가 내게 손을 한번 들어보이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내가 정신병원 뜰을 걸어나오다가 뒤돌아보니까 써니가 창가에 서서 내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나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걸었다.오후에는 이발소에 가 서 머리를 짧게 깎았다.이발소를 나와 집으로 오는길에,바람이 불면 뒷머리가 시렸다.
집에서는 밤늦게까지 책상에 앉아서 소설을 마무리지었다.어떻게든 끝이 있어야 하는게 소설이니까.맨 마지막에 제목을 써넣었다.「너의 우울한 계절」이라고.
애당초에는 그걸 어느 잡지사에 보내고 떠날 생각이었지만,나는생각을 바꿨다.휴가를 나오면 다시 한번 읽어보고 손을 보는 게좋겠다고 생각한 거였다.특히 마지막 부분은 자신이 없었다.
책상을 정리하고 몇가지 태워없애야 할 것들은 마당에 나가 불을 질렀다.자명종 시계를 맞춰 놓고,불을 끄고도 한참을 눈을 뜨고 있다가 아주 어렵게 잠이 들었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 않은 새벽에 나는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 입었다.
『저…군대 다녀오겠습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한 다음에 나는 어쭙잖은 시간이 싫어서 얼른 대문을 빠져나왔다.누구도 동행하는 게 싫다고 내가우긴 결과였다.
논산을 향해 떠나는 열차의 창가에서,나는 플랫폼에서 많은 사람들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나를 위해서 흔들리는 손은 거기 없었지만,그건 내가 쓴 소설의 마지막 장면하고도 일치하는것이었다.병영에 갇히러 가면서…나는 묘한 해방감 을 느끼고 있었다.스무살의 내게,그건 분명 슬픈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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