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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45年末까지 北지도자 未定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해방후 소련은 북한만을 소비예트화 하려 했는가.
아니면 한반도 전체를 위성국으로 만들려 했는가.한반도 전체를위성국으로 만들려 했다면 그 구체적인 전략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는 이 물음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해왔다.
이유는 이를 풀어줄 수 있는 당시의 관련 문건들이「극비문서」라는 딱지가 붙여진채 고문서보관소에서 50여년동안 낮잠을 자고있었기 때문이다.
中央日報가 이번에 단독입수한 당시 소련의 극비문서 파일(16건.대학노트 크기 5백여쪽)은 우리 현대사의 베일을 벗길 수 있는 결정적인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들 문건은▲「연해주 군관구 정치국의 조선정세 보고서」(45년 11월5일)▲「조선문제에 관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정서」(美蘇공동위 소련측 대표단에 보낸 훈령등 46년 2월부터 48년 4월19일까지)▲「스티코프의 조선임시정부 초 대내각안」(46년 3월7일)▲「소련군 총정치국장의 북조선 정세보고서」(45년 12월25일)▲「서울주재 소련총영사의 남조선 정세보고서」(45년 10월5일)등이다.
이들 문건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고 해설을 곁들인다.
◇북한의 최고지도자 결정=쉰킨의 보고서는『북조선의 정당.사회단체들을 지도할 수 있고 조선에서 소련의 이익을 고수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민족간부(친소 민족지도자)를 가장 빠른 시일내에선정및 양성하고 북조선 경제를 복구해 중앙집권 체제의 정권을 조선의 민주활동가에게 넘겨주는 것이 연해주 군관구 군사위원(스티코프)의 급선무』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어 소련군부는 스티코프의 의견을 참고로 하여『북조선의 최고지도자가 조기에 선정되더라도 그를 지도자로 양성하려면 최소한 4~5개월이 필요하다』고 건의하고 있다.
이는 당시 소련이 북한의 최고지도자를 지명하지 못했음을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조기에 소련의 위성국 정부형태인 임시인민위원회를 창설(46년 2월8일)하고 임시인민위원장은 장차 유력한 북한 최고지도자 후보임을 암시하는 중요한 문건이다.
따라서 소련이 김일성(金日成)을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지명한 시기와 관련,지금까지 우리 역사의 일부에서▲입북전 지명했다▲45년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김일성 환영대회」때 지명한 것이다▲김일성이 북조선공산당 제1비서로 선 출된 45년12월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회의때 지명했다는등의 주장은 오류였음이 밝혀졌다.
◇북한의 최고지도자 후보=쉰킨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소련군부가북한의 최고지도자 후보로 꼽고 있는 사람은 김일성.박헌영(朴憲永).조만식 3명이다.
보고서는 이들의 정치적 성향등을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김일성에 대해서는『인민들속에서 인기가 높은 저명한 당활동가로과거 조선과 만주의 빨치산 운동을 지휘했다.북조선 공산당의 조직 강화와 당원들의 사상및 정치교육.간부양성.민주주의 단체 결속등 사업을 진행했다』고 평가,당시 소련군부가 내부적으로 김일성을 지도자로 꼽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박헌영의 경우『조선공산당 중앙위 제1비서로 노련한 활동가다.
조선공산당 재건등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해방후 이영(李英)등 장안파 공산당과의 알력이 있었다』는 등 스탈린이 극히 싫어하는종파주의 경향성을 부각,군부가 그를 높이 평가하 지 않았음이 문서로 드러났다.
조만식에 대해서는『그가 이끄는 조선민주당이 창당된지 한달여밖에 되지 않지만 공산당보다 당원수가 많다.그러나 그의 소련에 대한 정치적 입장이 아직 모호하다』고 평가,언제든지 그를 배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감추지 않고 있다.
◇내각책임제 남북임시정부수립=소련외무부장관 몰로토프는 미소공위가 열리기 직전인 46년 3월16일 평양의 미소공위 소련측 대표단에게 보낸 소련공산당 중앙위 결정 소미공위 훈령 제1호에서▲내각제의 조선임시정부 수립▲내각은 남북에 균등 하게 배분하되 남한대표중 절반은 좌익이 차지▲신탁통치후 내각제 정부수립과단원제 국회 구성▲임시정부는 입법및 행정권만 갖고 내각에서 국방성과 외무성을 두지말 것 등을 지시하고 있다.
소련은 47년 5월까지 1,2차 미소공위가 열리는 동안 소련측 대표단에게 수차례 보낸 훈령에서『제1호 훈령의 기본틀속에서미국측과 협의하라』고 강조,소련의 한반도 소비예트화 전략을 고수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소련은 1차 미소공위에서 내각제 임시정부수립안이 원만히 합의될 것에 대비,공위가 열리기 전 임시정부 내각까지 구성해 놓고있다. 소련측 수석대표 스티코프대장이 46년 3월7일 소련공산당에 긴급보고한 「임시정부 내각명단」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도표참조〉 스티코프는 이 보고서에서『이 명단은 박헌영.김일성의 제안을 감안해 작성한 것』이라고 부언하고 있다.
만일 소련의 전략대로 내각제 임시정부가 수립됐다면 그 내각은스티코프의 조각안대로 구성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 스탈린으로부터 조선문제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전권대사」로 조선문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金局厚 현대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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