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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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우리가 앉은 맨뒤쪽 나무의자에서 보니까 성당 안은 정말이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열지어 늘어서 있는 빈 의자들… 그리고 저만치 맨앞의 큰 십자가,높은 천장의 구석에서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는 조명등… 성당 탑의 벽면을 가리고 있는 색유리를 통해서 스며든 여린 달빛….
『내 말 듣고 웃지마.아빠가 사는 걸 보니까 말이야,아빠 애인인 남자가 있었는데 말이야,어떤 애인도 그렇게 하기가 힘들만큼 아빠를 진심으로 보살펴주더라고.그러는 걸 보면서 생각한 게뭐냐믄… 엄마보다는 아빠 쪽이 낫다는 거였어.내 말 이해할 수있겠어…?』 나는 물끄러미 써니를 바라봤을 뿐이었다.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의 나는 써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이 한때에… 육체를 통해서… 진짜로 사랑할 수 있는건 딱 한사람 뿐이야.이건 분명해.엄마처럼 사는 건 더러운 짓이란 말이야.아빠는 최소한 그런 식으로 더럽지는 않았다구.』 너희 엄마도 동시에 여러 애인들을 둔게 아니라면 다를 게 없네.나는 입밖으로는 내지 않고,속으로만 그렇게 말했다.
『난 엄마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너를 다시 만난 건… 네 속에서 내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짐작했기 때문이야.내 시체가 강화도 병원에 있다고 내가 거짓말을 했을 때,너는 나를 찾기 위해서 강화도에 달려와 주었어.
그리고 주선이라는 애가 너를 유혹했을 때에도 너는 나를 팔아넘기지 않았어.그래서 너를 믿기로 한 거야.아냐.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너를 믿어도 좋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겨우 갖게 된거야.』 써니의 횡설수설을 들으면서 나는 무얼 따지거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다만 나는 써니가 겪고 있는 혼돈의 내용을 대강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했다.나는 마음이 아팠고 어쩐지 아주 슬펐다.말을 그친 써니는 기도하는 여자처럼 고개를꺾고 가만히 있었다.어쩌면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한손으로 써니의 턱을 들어서 얼굴을 들게 하고 가만히들여다보았다.써니의 눈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나는 그 무엇이 우리들의 사람의 정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들었다.아,우리는 모두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이 던가.
나는 써니에게 다가앉아서 써니를 꼬옥 품에 안았다.아,내 가슴이 더 넓고 단단해서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써니를 안전하게지켜줄 수 있기를 바랐다.나는 손바닥으로 써니의 등을 쓸어주었다.그것이 우리의 평화였다.
덜컹 성당 입구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불이 밝아졌다.
성당지기인듯 싶은 사내가 우리에게 나가달라고 요구했고,우리는 갑자기 죄인이 된 것처럼 성당을 빠져나왔다.
11월 중순이었다.학교식당에서 소라와 점심을 먹고 강의실로 가는 길에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불러세웠다.희수였다.
오랜만에 보는 희수였지만 나는 활짝 웃지는 못했다.그즈음의 나는 누구를 보고도 활짝 웃어보이지를 못했다.
우리 앞에 다가온 희수가 느닷없이 한손을 날리며 내 빰을 때렸다. 『넌… 아주 야비하고 나쁜 놈이야.』 그러더니 희수가 내게서 등을 돌렸다.순식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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