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갈릴레이가 산 교황 발목 잡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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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의 라 사피엔자 대학에서 14일(현지시간) 한 학생이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방문 반대 포스터를 읽고 있다. 이 학교일부 교수와 학생은 17일로 예정된 교황의 학교 방문과 강연을 조직적으로 반대해 왔다. [로마 AP= 연합뉴스]

 1633년의 ‘갈릴레이(右) 종교 재판’이 교황의 발목을 잡았다.

 바티칸 교황청은 16일(현지시간) “교황 베네딕토 16세(左)가 17일로 예정된 로마시내 라 사피엔자 대학의 방문 일정을 취소했다”고 발표했다.

교황은 당초 로마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이 대학의 705주년 새 학기 시작일을 맞아 대학에서 직접 강연할 예정이었다. 불과 하루 앞두고 일정이 갑작스레 취소된 것은 갈릴레이 재판에 대한 교황의 과거 발언을 문제 삼아 일부 교수·학생이 강연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2005년 4월 취임 이후 교황의 방문 일정이 해당 지역의 반발로 무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독일 출신으로 보수적 경향이 강한 베네딕토 16세는 1990년 추기경 시절 이 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해 그는 1633년 교황청이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재판에 회부해 이단이라고 판결한 데 대해 “재판은 이성적이고 공정했다”는 철학자 폴 파이어아벤트의 발언을 인용해 옹호했다. 또 “그 당시에도 가톨릭 교회가 갈릴레이보다 훨씬 더 이성에 충실했다”고 말했다.

 교황의 방문 소식이 전해지자 이 대학의 마르셀로 시니 물리학과 교수 등 67명의 학자와 진보적 학생들은 당시 발언을 문제 삼았다.

그들은 “교황이 과학적 사상을 공격하고 창조론 같은 시대착오적인 사상을 지지해 수세기에 걸친 과학적·문화적 진전을 비난하고 있다”며 조직적인 방문 반대 운동을 벌였다.

교황 방문에 맞춰 14일부터 ‘반(反)성직자 주간’을 선포한 뒤 갈릴레이의 삶에 관한 영화를 상영하고, 진화 및 동성애 관련 토론회를 열었다. 방문 당일엔 교황의 연설을 방해하기 위해 대형 확성기를 설치해 록음악을 틀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이 대학의 레나토 과리니 총장과 프란체스코 루텔리 이탈리아 부총리 등은 “라 사피엔자 대학은 1303년 교황이 설립한 학교다. 견해가 다르더라도 환영하자”며 학생들을 설득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 문제는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로마노 프로디 이탈리아 총리는 교수와 학생들을 비난하며 “추후 다른 공립대에 교황을 초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욱 기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이탈리아의 철학자 겸 과학자.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이어받아 지동설을 주장했다. 가톨릭 교회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교리(천동설)에 어긋난다며 종교재판에 회부하자 지동설을 부인하고 풀려났다. 그러나 재판정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992년 고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사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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