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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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남편은 이미 돌아와 있었다.
이렇게 이른 퇴근은 좀처럼 하지 않는데 무슨 일인가.
명치 끝이 또 철렁 내려앉는다.
『웬 일이요,이렇게 일찍이? 어디 편찮으세요?』 남편의 기색을 살폈다.
『웬 일은? 외식이나 할까 해서 빨리 돌아와보니 아무도 없더군.』 『외식을요?』 귀를 의심했다.
휴일 날 어쩌다 아이들이 외식하자고 졸라도 막무가내였던 남편이다. 『밤낮 하는 놈의 외식,지겹지도 않아? 내식하자,내식.
된장찌개 내식이 최고다.』 길례는 남편 말투를 흉내냈다.
『밤낮 하는 놈의 외식,지겹지도 않수? 내식합시다,내식.』 남편은 픽 웃었다.
『이 사랑 받을 줄도 모르는 여자야!』 -사랑? 사랑이 어디하사품인가.내려 주시면 감지덕지 받고,안내려 주시면 마냥 받지못하는… 그런 데면데면한 것이 남편 사랑이란 말인가.
여느 때 같았으면 이렇게 말대꾸했을 법한데,지금의 길례로서는그럴 필요가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남자들에게도 직감은 있는가.
생전에 안하던 일을 하고 안하던 말을 하는 것이 가슴 조였다. 남편이 이따금 「한눈 파는」것을 길례는 영락없이 알아차리곤했었다. 스무해 넘어 함께 살다보면,숨소리 기침소리 하나에서도상대방의 심리의 무늬를 읽게 된다.외도하고 들어온 남편이 평상같을 수는 없는데,표정이나 몸짓을 보고 눈치채는 것은 아니다.
뒷등을 보고 직감하는 것이다.
표정이나 몸짓은 꾸밀 수 있어도 등판의 분위기까지는 위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인간의 등은 정직하다.
남편도 뭔가를 느낀 것일까.
잠자리에 들자 더욱 해괴한 일이 일어났다.
「밤 달」이 돋게 「피리」를 불어 달라는 것이다.이른바 「입짓」이다.
이런 요구를 받아보기는 생전 처음이다.
『싫어요.』 거의 반사적으로 거부했다.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소.』 남편은 머쓱한 얼굴로 우겼다.
『노력? 할만큼 했어요.』 부부란,성(性)행위를 법적으로 인정받은 계약체라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한 조각의 애정 없이 어쩌다 갖는 부부간의 성행위를,그들이 부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윤리적」이라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경제권을 쥔 남편에 의해 강요받는 성행위는,섹스를 사고 파는 매춘(賣春)과 무엇이 다른가.
승강이 끝에 남편은 이불을 거칠게 걷고 자기 방으로 건너 가버렸다. 『앞으론 각방 쓰기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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