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호원정기>2.18시간 사투끝 여기는 "쿡"정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서울을 떠난지 8일째 되는 날 원정대는 마운틴 쿡(3천7백66m)의 해발 2천6백m지점인 린다빙하의 텐트 속에 머물러 있었다. 오전3시 눈을 떠보니 텐트 밖에 내놓았던 물이 꽁꽁 얼어 있었다.춥긴 추운 모양이다.
이제 정상정복에 나서야 한다.
헤드랜턴의 불빛이 만년설에 반사돼 어지럽게 반짝이는 가운데 러셀(선두에서 눈 다지는 작업)을 시작했다.
러셀을 맡은 후배 오치봉과 표덕기씨가 깊이 쌓인 눈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앞으로 나아갈수록 설벽이 점점 경사져 로프를꺼내고 아이젠을 착용했다.심설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아이젠에 달라붙는 눈이 아이스볼이 돼 전진하는데 여 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8명의 원정대가 모두 정상에 오르는 것이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오후4시 5명의 대원을 내려보냈다.이제 남은 인원은 나를포함해 치봉과 덕기 3명이었다.
오늘 정상에 못가면 내일 올라야 한다.문제는 날씨가 어떻게 변하느냐에 달려있다.빠른 속도로 2백m정도 되는 가파른 설벽을기어올랐다.이제부터 암벽지대.치봉이 리드하면서 암벽지대 중간에서 확보지점을 만들고 있는데 갑자기 헬기 소리가 들려 왔다.우리팀의 등반 모습을 찍으려고 온 모양이다.헬기가 되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이제 우리뿐」이구나 하는 쓸쓸함이 갑자기 솟아올랐다. 암벽지대가 끝나자 설능이 눈에 들어왔다.벌써 시간은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3명이 정상도전에 나선지 8시간이 흐른셈이다. 러셀에 따른 체력소모로 이 시점에서 정상을 공략하기는무리였다.그렇다면 비박을 할 수밖에 없다.비박장소를 찾던중 3천6백m지점에 있는 크레바스 속에서 조그마한 구멍을 찾을 수 있었다.허기진 배를 수프와 비스켓.육포로 달래며 비박준비 를 했다. 얼음구멍 밖에는 남반구의 달이 쿡 주변의 산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그런데도 우리는 동상에 걸리지 않으려고 배낭에 엉덩이와 등판을 기대고 장갑은 있는대로 껴야만 했다.원정을 나갈 때마다 항상 느끼게 되는 인간의 왜소함을 절감하지 않을 수없었다.아침 햇살이 퍼지면서 쿡 정상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이제 남은 문제는 어느 코스로 정상을 공략해야 하는가였다.
좌.우측으로는 청빙지대로 곳곳에 크레바스가 있어 이곳 루트로는 등반이 어려웠다.정면에서 바로 오르기로 했다.90도쯤 되는얼음통로로 직상하니 나이프릿지에 도달했다.이제 남은 것은 정상으로 이어지는 설능.가파른 나이프릿지에서 서로 몸을 의지하면서정상을 공략했다.10월17일 오전10시 드디어 정상에 섰다.
그러나 기쁨은 잠깐.강하게 부는 바람이 우리를 날려버릴 것같았다.정상에서의 교신과 하산은 바람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아름답게 보이는 쿡 정상의 경관도 배고픔을 채울 수는 없었다. 하산하면서 누군가 나를 두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허영호는하나님백을 등에 엎고 다닌다.』 모르는 말이다.언제나 어려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