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북녘동포>3.난무하는 유언비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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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보에 굶주린 주민들=국내소식은 물론 남한및 외국정보에 대한 관심은 주민 누구에게나 있다.
청진의 건축설계사 김영성(金永成.61)씨는『북한에서 유언비어전파는 놀랄 정도로 빠르다』며『어린이에서 노인까지 새소식에 민감하며 김일성.김정일의 동정에도 관심이 많다』고 증언한다.金씨는『직장마다 아침에 업무배정前 노동신문 독보회( 讀報會)를 갖는데 거의 졸며 앉아있다』고 말했다.평양광복거리의 40평형 아파트에 살았던 김명철씨는『우리 인민반의 27가구에 노동신문이 8부 배포됐는데 주민 대부분이 5~6面의 남조선소식과 국제소식에만 흥미를 가졌다』고 말했다.
대학생 박수현씨는『1~4面을 보면서 북한 내부소식이 노동신문에는 거꾸로 나온다는걸 잘 아는 주민들은 남한의 나쁜 측면을 부각하는 5面소식을 곧이 듣질 않게 됐다』고 한다.남녀노소 할것 없이 남조선의 데모장면 화면에서 학생들의 옷 차림만 뚫어지게 보고 여러 말이 나돌자 당국은 화면을 흐릿하게 처리해 내보내고 있다.유학생출신이나 대외일꾼이 농촌일손돕기에 나서면 농민들은 외국사정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다.물론 대답은 얼버무려진다. 안팎의 소식에 관심이 많은 것은 군대나 보위부 경비대같은 곳에서도 마찬가지다.회령의 22호관리소 정치범수용소 경비대에서근무하다 94년9월 탈북(脫北)한 안명철씨는『경비대에서도 출장나갔다온 사람이나,부모의 사망으로 휴가갔다온 동료 들에게 사회소식과「중국이 개혁.개방 덕에 몰라 보게 잘살게 됐다」는 등의소식을 듣느라 밤을 세운다』고 밝혔다.
김영성씨는 유언비어 가운데는 국가안전보위부가 고의로 조작된 정보를 퍼뜨린뒤 주민 반응을 살피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덧붙인다. ▲정보듣기의 창구=당국은 라디오 주파수와 텔레비전수상기의채널을 납땜으로 고정시키고 모두 분주소(파출소)에 등록토록 하고 있다.그러나 극소수의 주민들은 납땜을 풀거나 아예 신고하지않은채 외제 카세트를 구해 은밀히 남한방송을 듣고 있다.
원산과 평양을 주무대로 일한 무역일꾼 김동만(43.가명)씨는『평양~원산고속도로의 승용차안에서 납땜하지 않은 차라디오로 한국 사회교육방송을 즐겨 들었다』고 한다.
개성 소아병원의 간호원 임정희(林貞姬.30)씨는『주파수 추적의 소문으로 몇차례씩 껐다가 다시 듣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함흥에 살던 여만철씨의 증언.
『남한과 홍콩 합작상품인 카세트 녹음기를 갖고 있어 남한방송을 자주 들었다.KBS라디오.사회교육방송을 즐겨 들었다.카세트에 남한방송이 매우 잘 잡힌다.카세트는 10가구에 하나꼴로 있는 편이다.북한의 주민생활이 궁핍해지면서 정보통제 체제도 무너져가고 있다.』 회령 탄광노동자 황광철(黃光鐵.21)씨도『90년12월 중국 조선족동포에게 라디오를 구입해 김치움에 숨겨놓고남몰래 남한의 사회교육방송을 들었다』고 한다.
압록강.두만강유역의 극소수 주민들은 중국텔레비전방송을 몰래 시청한다.만포에 살던 조명순(34.여.가명)씨의 증언.
『당국에서 텔레비전 채널을 고정시켜 놓았지만 풀어놓았다가 검열할 때 다시 고정시키곤 했다.우리집은 늘 아파트문을 채우고 있어 옆집에서도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중국텔레비전을 보는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주위에 천연색 텔레비전을 갖고 있던 간부들이 중국방송을 시청하고 남한 얘기를 자주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가지 특이한 정보루트는 외부소식을 사실 그대로 일정 급수 이상의 간부들에게 알리기 위한 비밀자료 「참고신문」.『노동신문 절반 크기의 참고신문은 구역의 당책임비서.안전부장.보위부장등 간부들에게 제공되며 주로 국제정세가 실려있다.』(엄 만규씨) 윤웅.이정철씨등 대학생은 고위간부를 아버지로 둔 친구들집에서 간혹 참고신문을 보았다.
연변 조선족 보따리장수들은 농민시장에서 안전원이나 6.4그루빠등의 눈을 피해 한두마디씩 던진다.이것이 주민들에겐 소중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된다.당국은 연변 장사꾼들이 평양마저 물을 흐려놓을까봐 평양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한 다는게 무역일꾼 출신의 김명철씨의 증언이다.
외화벌이를 하며 북한 전역을 휩쓸고 다니는 거간꾼들도 안팎의돌아가는 일을 훤히 꿰는 정보통이다.
정무원의 무역회사 대외사업지도원 김동만씨는『외화벌이 일꾼들은재일동포나 일본인들과 무역상담을 한뒤 술자리에서 외부의 소식을듣는 경우가 흔하다』며『간혹 일본에서 상품을 일본신문으로 포장해 보내는 수가 있어 일본신문에 실린 남한 소 식을 읽기도 했다』고 전한다.
***“간첩도 소문이용” ▲유언(流言)의 전파력=귀순자들은 북한의 신문이 사회문제나 사건.사고를 다루지 않아도 북한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대개는 알고 있었다.그들의 말마따나「말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것이다.
소문이 얼마나 빨리 퍼지는지 인민군의 한 교양자료에『영화배우한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평양에서 함북 온성까지 하루만에 퍼지더라』는 대목도 있다(인민군 중위 임영선씨 증언).이 교양자료는 소문의 확산을 막기 위한 당적 투쟁 자료다.
이 자료에는 남한간첩들이 소문을 통해 서로 연락하는 암호통신망을 이용한다는 설명도 있다고 한다.
『출장원들이나 물자조달원등 항상 이동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비교적 말이 많은 편이다.여관 한방에 7~10명 정도가 모이면 각지의 소식을 전하며 장사관련 정보를 교환한다.
그러다 간혹 입조심을 해가며 남조선 경제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도 있다.이들은 일단 말문이 터지면 남조선소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과시하듯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눈다.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들과 남조선 얘기를 나눌때는 흔히 부정적인 내용 을 섞어 말하는 버릇이 있다.』(고청송씨.34) 빠른 속도로 번지는 소문중에는 북의 대남공작에 관한 것도 더러 있다.83년 아웅산태는인민무력부 정찰국에서 했다거나,대한항공 폭파사건은 북한 공작원의 짓이란 소식이 떠돈다는 것(김명철씨).
김영성씨는『아웅산사태를 노동신문에서 남한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하면 주민들은 이와는 반대로 북한이 저질렀다고 생각한다』며 대한항공사건.땅굴사건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언론통제가 심한 사회에서 독자들은 신문기사를 뒤집어 해석하는경향이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바깥정보유입의 영향=외부소식에 밝은 주민들일수록 믿을만한 몇몇 친구를 만나면 북한의 앞날을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는 것이확인된다.
고청송씨는『도당 간부과 지도원등 체제수호의 골간이 되는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동구는 왜 망했나」「북한체제가 결국 무너질것같다」「북한도 시장경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등의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와 달리 김명철씨는『외부소식에 비교적 밝아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이 실업수당.복지등의 면에서 뛰어나다고 생각하면서도 북한식사회주의가 우월하다고 믿고 싶었다』고 한다.그는 또 북한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개혁.개방을 하면「간첩」이 침투 해 나라를 혼란시킬 것이라는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고도 했다.이런 실정에서 소련.동구권의 붕괴뒤 일부 유학생은 외부세계에 도무지 감감인 북한 주민들을 계몽하기 위해서라도 귀국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는 증언도 있다.
***유학생 전국조직 윤웅씨의 증언.
『내가 다니던 청진 광산금속대학에는 유학생들이 복귀했는데 90년에 조직결성 혐의로 5명이 체포됐다.당시 학생들의 반응이 어수선했다.
유학생들이 친한 친구들에게『내가 유학간 것은 장군님의 배려가아니라 부모님의 노동의 대가다.우리가 딴 곳으로 뛰지않고 북한에 되돌아 온 것은 사람들을 계몽시키기 위해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다 문제가 되곤 한다.
91년에는 김일성대.김책공대에서 유학생들이 여럿 잡혀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93년 2월에는 김일성대학에서 유학생들을 묶어전국적인 조직을 건설하려다 발각됐다.김일성대학에는 각도의 제일고등중학교(영재학교)출신들이 많은데 제1고중까지 조직을 확대하려다 발각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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