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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대통령 1년] 5. 민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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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부에 대한 잘잘못 평가는 민생에 달려 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평가의 우선순위다. 중앙일보와 동아시아연구원(EAI)의 참여정부 1주년 설문조사에서 노무현 대통령 지지도와 경제분야의 점수가 함께 낮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경기.실업.신용불량자 대책 등 민생 분야의 성적표는 일반인.전문가 조사 할 것 없이 낙제 수준이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괜찮은 항목이 물가와 부동산 안정이다.

대선에서 盧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 전문가와 학자들조차 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고 있다면 변명하기 어려운 정책 실패다.

시선을 넓혀 외환위기 이후의 지난 몇년을 보면 경제환경이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불확실해졌다. 자율과 개방의 확대로 기회는 늘었지만 의사결정에 따른 위험부담 역시 커졌다.

경쟁의 증가로 시장 전반의 효율은 증가했지만 경제 주체 상호 간의 갈등은 심화됐다. 정부 주도의 자원 배분이나 분배를 무시한 성장일변도 정책의 설 땅이 좁아진 것이다. 국내와 해외시장을 가리지 않고 치열해지는 외국 기업과의 경쟁도 달라진 모습이다. 정부의 역할도 바뀔 수밖에 없다. 기업과 금융부문의 구조조정을 조속히 마쳐 시장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예기치 못한 충격에 대비한 다양한 위험관리 조치를 강구하는 것이 가계나 기업을 돕는 길이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 후반기로 오면 구조조정과 같이 해야 할 일은 미루고 신용카드 남발과 같이 삼가야 할 일에 열을 올렸다.

盧정부는 이런 부채를 떠안고 출범했다. 이 정부가 제일 먼저 했어야 할 일은 이전 정부의 잘못을 정면돌파 방식으로 시정하는 일이었다. 그랬다면 지금쯤 세계경제의 활황을 타고 내수경기도 나아지고 각종 개혁과제도 훨씬 힘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1년을 돌아보면 동북아 허브나 국민소득 2만달러와 같이 현실감이 부족한 과제들이 당장 급한 일처럼 부각되고 정작 창의성과 변화가 필요한 사안은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경기 대응을 위해 금리를 낮추고, 세금을 깎고, 추경예산을 짰지만 긍정적 효과보다는 부동산 과열 같은 부작용이 컸다.

농가부채 탕감, 신용불량자 및 카드사 구제, 원칙 없는 노사문제 개입 등 과거의 실패한 방식이 자주 반복되면서 정부에 대한 시장의 신뢰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이러다 보니 인정받을 수 있는 정책까지도 효과를 의심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정도를 밟아야 정부도 살고 경제도 산다. 사람을 바꾸건 정책을 바꾸건 시장에서 정부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다. 노동시장의 구조변화에 따른 수급 불일치로 실업이 고착돼 있는데 정부는 임시로 사람을 쓰고, 일자리 늘리는 기업에 세금 깎아주는 식의 대증(對症)요법으로 나서니 딱한 일이다.

논란은 있었지만 그래도 부동산 대책이 먹혔던 것은 일관성 있게 정책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정부 부처 중 기획예산처와 공정거래위원회에 대한 전문가 평가가 높게 나온 것도 오락가락한 부분이 제일 적었기 때문이다.

신뢰회복을 바탕으로 정책목표의 우선순위도 정비해야 한다. 장기 국정과제를 다루는 위원회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장기과제에 밀려 투자환경 조성, 금융 구조조정, 농업구조 혁신, 외국인 투자 정책과 같은 시급한 현안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연금.세금과 같이 민생과 나라살림에 직결되는 재정 현안에 대한 관심 또한 높여야 한다. 정치인과 재벌이 유착돼 세금 도둑질을 해대니 서민만 죽어난다는 분노를 잠재우는 길은 세금공제 조항 몇 개 늘리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인 재정개혁을 통해 공평하게 세금을 내고 그 대가로 양질의 정부 서비스를 제공받는 시스템을 정착하는 것이다.

서민들로 하여금 편하게 내 집을 마련하고, 납득할 만한 세금을 내며, 안정적인 노후를 설계할 수 있게 해주는 것보다 소중한 정책목표는 없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

<국정 평가팀 명단>

◇EAI(동아시아연구원)정책평가위원회=임현진(서울대.사회학)위원장, 김균(고려대.경제학).김병국(고려대.정치학).김용호(인하대.정치학).박재완(성균관대.행정학).송호근(서울대.사회학).윤영철(연세대.신문방송학).이내영(고려대.정치학).이종수(한성대.행정학).이종화(고려대.경제학).이주호(KDI국제정책대학원.경제학).전주성(이화여대.경제학).정진영(경희대.정치경제학).하영선(서울대.국제정치학)교수

◇중앙일보 평가팀=신창운 여론조사 전문위원, 전영기 정치부 차장

<사진설명전문>
신용카드 불량자와 넘쳐나는 실업자는 참여정부 민생정책 실패의 현주소다. 특히 '이태백'(이십대 태반은 백수)이란 신조어를 낳은 청년실업은 단기 대책으론 해결이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사진은 지난해 부산에서 있은 한 채용박람회에 몰려든 구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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