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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줄 들어선 이재무 시인 시집 『저녁 6시』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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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중년 남자의 구부러진 뒷모습이 보였다.

이재무 시인(사진)의 8번째 시집 『저녁 6시』(창비)를 읽으며 문득 떠오른 풍경은, 어느 중년 남자의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건, 어느새 중년이 된 자신을 불현듯 깨달은 한 남자의 안쓰러운 얼굴이었다. 시인은 그 곤혹과 난처함을 말하고 있었다.

이재무는 한국 시단의 ‘열혈 청년’으로 통하던 시인이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그는 늘 호탕했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나 그도 쉰 줄에 들어섰다. 이른바 ‘58년 개띠’ 신세니, 서양 셈법을 따라도 그는 어엿한 오십 대 중년이다. 특유의 시원한 웃음과 함께 시인이 일화 하나를 들려줬다.

“오랜만에 황석영 선생을 만났는데 이 양반이 대뜸 이러시더라고. ‘야, 재무, 너 언제 이렇게 늙었냐?’ ‘무슨 말씀이세요, 저도 쉰입니다’ ‘뭐? 네가?’ 아직도 어른들은 팔팔한 이재무만 기억하시더라고 ….”

그러나 시인은 늙은 육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몰래 숨겨놓은 애인 데불고/소문조차 아득한 포구에 가서/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좋겠다, 마량에 가면’ 부분)하고 아내 몰래 불온한 꿈을 꾸기도 한다.

하나 거기서 멈추면 철부지 넋두리에 그치고 만다. 시인은 지금 삶의 한 경계에 서 있다. ‘몸과 마음의 틈바구니’에서 갈등하고 주저하는 것이다.

‘몸 늙으면 마음도 함께 늙었으면 좋겠다/나이를 따로 먹은 몸과 마음의 틈바구니/청승은 불쑥 고개를 든다’(‘청승’ 부분)

시인이 읽으라고 짚어준 시편은, 시인으로서의 자의식과 관련한 작품들이었다. 이를 테면 ‘내 생전 언젠가는 찾아갈 거야, 푸른 고독/광도 높은 별들 따로 떨어져 으스스 춥고/쩡쩡 우는 한겨울 백지의 광야/방랑과 유목의 부족 찾아갈 거야’(‘푸른 늑대를 찾아서’ 부분)와 같은 단호한 몸가짐을 시인은 읽어달라고 내밀었다.

하나 눈에 밟히는 시편은 달랐다. 쓸쓸함과 허전함의 정조는 잔뜩, 시집 전체에 드리워져 있었다. 예컨대 이런 경우다. 어느 날 시인은 선배 시인의 부음을 듣는다. 하나 뒤이어 취한 시인의 행동은 다음과 같이 팍팍하다.

‘벌떡 일어나 창밖 하늘을 응시하는 것도 잠시/책상서랍의 묵은 수첩 꺼내 익숙하게/또 한 사람의 주소와 전화번호 빨간 줄을 긋겠지’(‘빈 자리가 가렵다’ 부분)

시인은 충남 부여 출신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고 어려운 살림에서 성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굳은 각오로 상경했다. 그리고 그는 수다한 ‘58년 개띠’들처럼 ‘70년대 상경파의 불운한 생’(‘봄밤’ 부분)을 온몸으로 겪었다.

“쥐뿔도 없는 촌놈이 서울에서 살아내는 것도 쉽지 않은데, 나는 시를 쓰며 서울을 살아냈다. 아무 기댈 곳 없는 서울에서 24년이나 시를 쓰며 살아온 내가, 나는 대견할 때가 있다.”

그래, 맞다. 대견하고 고맙다. 하여 시 한 수 옮겨 적는다. 오늘을 사는 중년 남자의 먹먹한 가슴, 가만히 쓰다듬는 시편이다.

‘하늘이 내린 본성대로 통 크게 울며/생의 벌판 거침없이 내달리고 싶었다/배고파 달이나 뜯는 밤이 올지라도/출처 불분명한 밥은 먹지 않으려 했다/그러나 불온하고 궁핍한 시간을/나는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머리 조아리는 날 늘어갈수록/컥, 컥, 컥 나오지 않는 억지 울음/스스로를 향해 짖고 있었다’(‘울음이 없는 개’ 부분)

글=손민호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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