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고용 쇼크 이후 갈수록 커지는 경기침체 우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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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30면

“실업률 5%대 진입은 경기 침체의 전주곡이다.”

미국의 지난해 12월 실업률이 예상을 깨고 5%로 치솟자 월스트리트의 전문가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말 그대로 적색 경보다. 마침내 경기 침체가 가시권으로 들어온 것이다.

월스트리트 전문가들은 그동안 “경기가 둔화되긴 하겠지만 침체로까지야 치닫겠느냐”고 애써 낙관론을 펴왔다. 대부분 ‘침체’라는 말을 극구 아껴왔다. 하지만 분위기는 달라지고 있다.

“1949년 이후 고용지표는 경제가 침체에 빠지는 순간부터 악화됐다. 이번처럼 침체가 본격화하기도 전에 실업률이 0.3%포인트 급등한 적은 없었다. 실제 침체에 빠지면 고용사정은 더 악화할 가능성이 크다.” 투자은행 베어스턴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존 라이딩의 말이다. 다만 ‘월스트리트의 영원한 낙관론자’인 애비 코언 골드먼삭스 투자전략가는 “실업률과 취업자수 통계는 부정확해 대폭 수정되는 경우가 잦다”며 “이번 지표만으로 침체가 온다고 판단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말했다.

미국 뉴욕 증권시장 등 주요국 주가는 급락했다. 국제유가(서부텍사스중질유 기준) 100달러 돌파 소식에 휘청했던 글로벌 증시는 미 고용악화 쇼크에 다리가 풀려 중심을 잃은 모습이다.
 
왜 고용지표인가

미 부동산 거품이 꺼지는 과정인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에도 불구하고 미 경제가 침체에 빠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전망이 최근까지 유지됐던 배경에는 탄탄한 고용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 경제는 ‘고용→소비→성장’이라는 순환 흐름을 보인다. 일자리가 줄지 않으면 미 경제의 엔진인 소비가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민간소비는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2에 달한다. 고용만 잘 유지된다면 금융 영역에서 서브프라임 사태가 심해져도 재화와 서비스를 직접 생산하는 실물 영역은 큰 탈 없이 굴러갈 수 있다.

그래서 서브프라임 2차 위기가 발생한 지난해 9월 이후 글로벌 투자자와 전문가들은 미국의 고용·소비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소비가 예상보다 조금만 늘어도 ‘미 경제에 침체는 없다’는 낙관론이 제기되곤 했다. 그런데 기어코 지난해 12월 실업률이 5%를 넘어선 것이다. 취업자수 증가도 예상치를 크게 밑돌았다.

여기에다 고용지표의 자체 특성이 파장을 증폭시키고 있다. 실업률과 고용자수 등은 매월 정기적으로 발표되는 경제 지표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다. 조사 시점과 발표 시점 차이가 보름밖에 나지 않는다. 분기별 경제 성장률은 한 달 걸린다. 고용지표는 시장이 거시경제 상황을 사실상 실시간으로 판단할 수 있는 지표인 셈이다. 그래서 미국의 각종 거시경제 지표 가운데 뉴욕 주가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포스트 버블 시나리오

많은 전문가는 현재 미 경제가 일반적인 경기 사이클과 다른 국면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 단순히 경기가 확장된 뒤에 맞는 위축 국면과는 성격을 달리한다는 얘기다. 닷컴 거품에 따른 2001~02년 침체에서 벗어났던 미 경제가 2003년 이후 새로운 자산 거품을 한껏 키웠다. 경기 침체가 거품 붕괴와 맞물리면 그 고통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세계 6대 자산운용사인 미 노던 트러스트 수석 이코노미스트 폴 캐스리얼은 “집값 하락 하나만으로도 경제가 침체에 빠질 수 있는데 신용경색까지 겹쳤다”며 “경기 침체 확률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캐스리얼의 예측대로라면 이번에 발표된 고용지표가 나중에 더 좋게 수정되더라도 큰 흐름에서는 달라질 게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지난 연말 쇼핑 시즌의 소매 판매가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3% 남짓 늘어나는 데 그쳤다. 약 5% 정도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에 못 미쳤다. 미 경제 엔진인 소비가 이미 식어가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결국 미 경제는 ‘거품붕괴→고용·소비 위축→침체’로 이어지는 포스트 버블 시나리오대로 움직일 공산이 더욱 커진 것으로 풀이된다.
 
글로벌 경제는

여전히 세계 경제 성장의 엔진 역할을 하고 있는 미 경제가 포스트 버블 시나리오에 따라 침체에 빠진다면 글로벌 경제는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글로벌 금융시장이 서브프라임 여파로 겪고 있는 신용경색(유동성 축소)은 오일 머니나 차이나 달러로 상당 부분 해소될 수는 있다. 실제 두바이와 중국 국부펀드 등 신흥 자본이 서브프라임 사태로 위기를 맞고 있는 씨티그룹 등 글로벌 대형 금융회사에 활발히 투자하고 있다. 실세금리 등으로 금융 소비자들의 부담이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대형 금융회사가 무너질 가능성은 일단 작아진 셈이다.

그러나 집값 하락과 고용 악화에 따라 미국의 소비가 위축된다고 할 때 이를 대신할
다른 소비시장은 아직 찾아보기 힘들다. 중국과 중동, 러시아 등 신흥국이 막대한 자금력을 자랑하면서 고도 성장을 구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 나라의 중산층은 아직
미국 중산층만큼 충분한 소비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여기에다 신흥국 소비를 옥죄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밀과 옥수수 등 곡물 값의 급등이 그것이다. 이는 인플레이션 압력을 키울 뿐 아니라 신흥국 중산층의 공산품 소비까지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결국 이번 미 고용지표 악화는 글로벌 경제가 올 한 해 혹독하게 견뎌내야 할 폭풍우를 알리는 전주곡인 셈이다.
 
금리인하 효과는

미 실업률이 5%에 진입하자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오는 30일로 예정된 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 금리를 0.25%포인트 내린다는 게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심지어 0.5%포인트 인하를 예측하는 전문가들이 늘고 있다. 이렇게 금리를 내리면 미 기준 금리는 4% 또는 3.75% 수준에 이른다.

효과가 있을까! FRB는 서브프라임 사태가 악화된 지난해 9월 기준금리를 0.5%포인트 내린 뒤 10월과 12월 각각 0.25%포인트씩 더 인하했다. 하지만 반짝 효과에 그쳤다. 1998년 헤지펀드 롱텀캐피털 사태가 발생한 직후 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이 기준금리를 연속 세 번 내려 경기 침체를 막았던 경우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게다가 유가·곡물가·원자재값이 급등하고 있어 인플레이션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일부 전문가들은 금리를 더 내려도 침체를 막기 어렵고 오히려 인플레만 키워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고물가)의 늪으로 미 경제를 밀어 넣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린스펀이 남긴 버블을 물려받은 벤 버냉키 FRB 의장의 고민은 깊어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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