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일본 살려낸 대장성 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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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당신들은 모두 엘리트 중의 엘리트다. 당신들의 두뇌는 정말 최고다. 따라서 머리 쓰는 일은 모두 제군들에게 맡기고 불초 가쿠에이는 책임만 지겠다.”

 1962년 43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 최고 관청인 대장성 장관으로 임명받은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가 취임식장에서 대장성 관료들에게 한 말이다. 무학의 다나카가 도쿄대 법학부 출신들로 가득한 대장성 관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취한 전략적 발언이었다. 하지만 걸걸하고 불도저 같은 성격의 다나카가 이렇게 관료들을 치켜 세운 건 당시 얼마나 대장성의 ‘끗발’이 막강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34년 후인 96년,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총리가 “대장성을 해체하고 중앙부처를 전면 개혁하겠다”고 했을 때 관청가나 언론들은 “그게 되겠느냐”고 냉소했다. 전후 유엔연합군 총사령부(GHQ)가 해체 대상 1순위로 대장성과 내무성을 지목했지만, 대장성은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살아남았을 정도로 막강했기 때문이다. 하시모토 총리가 개혁의 칼을 내밀었을 때도 대장성 관료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전방위 로비에 나섰다. 98년 말에는 전문가 집단이 “대장성 이름을 유지하자”는 제안을 하도록 회유하기도 했다. 그래서 대장성에 과다집중된 권한을 분산하기 위해 재정과 금융 부문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가로막혔다. 그럼에도 4년여 만에 대장성 개혁은 실현됐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 전 경제산업청 장관은 “당시 ‘작은 정부’는 사회의 필연적 흐름이었다”고 분석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지도자의 철학과 의지였다. 하시모토 전 총리는 관료의 반발에 부닥칠 때마다 “내 몸이 불덩이에 다 타도 좋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중앙집권식 금융체제가 일본의 금융경쟁력 약화를 초래했다는 철저한 자성 때문이었다. 그러곤 ‘1부(내각부) 22개 부처’ 체제를 ‘1부 12부처’로 간소화했다. 단순히 부처 숫자만 줄인 것이 아니다. 사회 전반의 흐름을 ‘관’에서 ‘민’으로, ‘규제’에서 ‘자립’으로 바꾸는 ‘질의 개혁’을 이뤄냈다. 경쟁원리의 도입으로 일본 경제는 결과적으로 살아났다.

 이명박 당선자는 “대장성 개혁은 감탄할 일”이라고 말했다. 다음 정권에서 또 뜯어고쳐질 성격의 단순한 정부조직 개편은 안 된다. 앞으로 국가와 국민의 존재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까지 고려한 큰 청사진을 행정 개혁에 반영하길 바란다. 

김현기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