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구의 역사 칼럼] 남편 세상 떠나자 烈女 된 화순옹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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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 27면

1758년(영조 34) 1월 17일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가 죽었다. 화순옹주는 요즘 TV 드라마 ‘이산’에서 세손인 정조를 해하려 획책하는 인물로 나오는 화안옹주의 한참 위 언니다. 화안옹주만큼이나 영조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화순옹주가 아버지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화순옹주는 월성위(月城尉) 김한신에게 시집갔다. 이 부부는 ‘어진 부마와 착한 옹주’로 불릴 만큼 당시 아름다운 커플로 손꼽혔다. 혼인한 지 16년이 지나 김한신이 38세에 죽자 화순옹주는 따라 죽기로 결심하고 그야말로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딸이 굶고 있다는 말을 들은 영조는 몸소 찾아가 미음 먹기를 권했으나 옹주는 미음을 한 모금 마시고는 곧 토하고 말았다. 영조는 이미 딸의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탄식했다. 음식을 끊은 지 14일 만에 옹주는 죽었다. 이로부터 29년 뒤, 정조는 이 옹주 고모에게 열녀문을 하사해 유려한 문장으로 그 덕을 칭송했다.

“아! 참으로 매섭도다. 옛날 제왕의 가문에 없었던 일이 우리 가문에서만 있었으니, 동방에 믿음 있는 여인이 있다는 근거라. 어찌 우리 가문의 아름다운 법도가 빛나지 않겠는가. 더구나 화순 귀주는 평소 성품이 부드럽고 고우며 본디부터 죽고 사는 의리의 경중을 잘 알고 있었으니 외고집의 성품인 사람이 자결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 참으로 어질도다.”

화순옹주는 왜 자진(自盡)을 했을까? 부러울 것이 없는 왕의 딸이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까. 더구나 성격이 외고집도 아니었다고 하지 않는가. 『공자의 이름으로 죽은 여인들』에서 전여강은 중국 명나라 때에 열녀가 양산된 것은 당시 과거에 계속 불합격하는 남성들이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여성의 순절에 투사하여 여성의 도덕성을 그야말로 눈물 나게 찬양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에서든 중국에서든 여성이 원했던 것은 그들 자신에 대한 이러한 찬양이었다. 즉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몇 년 전 40세의 몸짱 아줌마가 나타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매스컴은 한동안 그가 어떻게 그런 멋진 몸매를 지니게 됐는가를 보도했다. 나를 포함해 많은 아줌마가 그를 부러워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명제는 가능하지 않을까. ‘오늘날의 몸짱 아줌마는 조선시대의 열녀이다’. 말이 되는 소린가? 하나는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고 하나는 남자로부터 안 보이기 위한 것인데. 의문은 당연하다. 그러나 가만히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이 둘은 모두 자기만족을 얻고 또 동시에 뭔가 인정받기 위해 그런 행위를 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조선시대에는 도덕적인 여성이 의미 있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여성들이 열녀를 지향했고, 오늘날은 건강하고 성적 매력이 넘치는 여성이 인정받기 때문에 몸짱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수백 년 변함없는 핵심은 바로 노력 그 자체다. 당대의 최고 가치·선망·취향·경향성 등은 시대에 따라 바뀌고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 자체는 그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여성이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저력의 근원을 조선시대 열녀 되기에서 찾는다면 난센스일까. 조선시대에 그렇게 많은 열녀가 나왔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리가 어떤 일이든 지향하여 성과를 낼 수 있는 강력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앞으로 이 에너지를 어디에 쏟을 것인가는 생각할 문제다. 다시 열녀가 되자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또 모두 다 몸짱이 되자는 얘기도 아니다.

대선이 끝났다. 대통령 당선자는 우리의 이 넘치는 에너지에 대해 알까? 그것이 때로
위험한 것일 수도 있지만, 잘만 유도되면 그 무엇을 하기에도 유용한 자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