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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과외교사 MB노믹스 키를 잡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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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보이(old boy)가 돌아왔다’. 사공일(67·사진) 전 재무장관이 대통령직 인수위
원회의 국가경쟁력강화 특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특위는 정부 조직 개편, 한반도 대운하, 과학비즈니스 도시 건설, 외국인 투자 유치 방안 등을 만든다. 사람들은 특위를 ‘인수위 속의 인수위’라고 부른다. 이명박 당선자는 왜 ‘올드 보이의 귀환’이란 달갑지 않은 말을 들어가면서 인수위의 심장부에 사공 전 장관을 기용한 것일까. 이 인사(人事)가 이명박 정부의 방향성을 파악하는 데 단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1970년대 중반, 한 사람은 국책연구기관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수석연구원이었고, 한 사람은건설회사 부사장이었다. 정부가 시장을 주도하고 국책연구기관이 재계와 접촉하며 경제정책을 연구하던 시기, 한살 터울의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그 뒤 80년대 중반 한 사람은 경제수석이 됐고, 다른 한 사람은 현대건설 사장이 됐다. 사공일 전 재무장관과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얘기다. 경제수석 사공일은 철권통치자 전두환 대통령의 머리를 3년8개월 장악한 경제정책 실권자였고, 현대건설 CEO 이명박은 오너 정주영 회장의 위임을 받아 파죽지세로 회사를 키워나갔다. 그 뒤 사공 전 장관은 정부를 떠났고, 이 당선자는 현대를 떠났다. 사공 전 장관은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사건으로, 이 당선자는 선거법 위반으로 각각 시
련을 겪었지만 교분은 계속됐다. 2002년 초 의욕적으로 서울시장 출마를 준비하던 이 당선자의출판기념회. 이 당선자는 정치인들을 제쳐두고 사공 전 장관에게 축사를 부탁했다.

5년 뒤 대선에 뛰어든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후보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였던 경제 살리기 특위의 고문으로 사공 전 장관을 영입했다. 30여 년 지속된 두 사람의 인연은 대통령 당선자와 국가경쟁력강화 특위 위원장으로 이어져 더 단단해졌다.

사공 전 장관이 펄펄 날았던 시절을 돌아보는 것은 그의 관심과 관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경북 군위 출신의 사공 전 장관은 미국 뉴욕대 교수를 지낸 경제학자였다. 그는 KDI 부원장-산업연구원장 등을 거치며 학자에서 정책가로 거듭났다. 그가 경제수석을 거쳐 재무장관을 지낸 5공화국은 군사정권이었다.

경제를 몰랐던 전두환 대통령은 김재익(청와대 경제수석), 강경식(재무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김기환(상공차관), 사공일 등 구조조정과 개방이 한국 경제가 살 길이라고 믿던 테크노크라트와 정책가들을 발탁했다. 정치는 자신이 맡고, 정치 논리가 경제를 뒤흔들지 못하도록 보호막을 쳤다. 군사정권이 펼쳐든 강력한 정치 리더십의 우산 아래에서 경제정책은 비교적 일관성을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경제는 탄탄해졌다. 3저(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효과도 있었지만 5공 경제팀이 강력한 안정화 시책을 통해 한국 경제의 고질병이던 인플레이션을 잡고 경제 체질을 튼튼하게 만들어 놓은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재벌들의 도약도 눈부신 시기였다. 현대가 포니엑셀을 처음으로 미국에 수출하고, 삼성반도 체가 256KD램을 개발했다.

“당시 테크노크라트 출신의 5공 경제팀엔 ‘경제는 성장을 지속해야 한다. 성장하는 길은 개방이다. 개방하면 언젠가는 민주주의가 되지 않을수 없다. 개방정책으로만 간다면 군사정권이 민주주의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은 견디자’는 공감대가 었다. 테크노크라트들이 좋은 아이디어를 실현하기엔 괜찮은 시절이었다.”(김기환 서울파이낸셜포럼 회장)

사공 전 장관을 전두환의 ‘경제과목 과외 강사’로 소개한 이는 고 김재익 수석이었다. 사공 전 장관을 KDI 부원장으로 발탁한 이는 김기환 당시KDI 원장이었다. 사공 전 장관은 83년 아웅산 테러 사건 때 숨진 김재익 수석의 뒤를 이어 경제수석이 됐다. 그때 대통령 비서실장은 강경식 전 재무장관이었다.

사공 전 장관은 김 수석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5공 경제정책의 밑그림을 짠 김 수석은 ‘속인의 옷을 입은 성직자’란 평을 듣는 원칙과 이상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사공 전 장관은 보다 현실적이었고 수완 좋은 정책가였다. 그는 “어떤 정책을 하려면 어느 섹터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고, 대통령에게 어떻게 보고해야 되는지 알고 있는, 정치경제학에 강한 사람”(김정수 중앙일보 경제전문기자)이었다.

그는 경제수석 시절 전임자였던 김 수석이 도입했던 파격적인 저금리 체제를 시장상황에 맞게 조정해 갔고, 김만제 재무장관과 콤비를 이뤄 금융시장의 골칫덩이였던 부실기업들을 정리해 갔다.

전·현직 경제관료들은 사공 전 장관을 “굉장히 실용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산업연구원장 시절 연구원이 중소기업에 신기술 동향과 첨단 산업 정보를 제공하도록 만들었다. “어느 업종이 유망한지는 업계가 더 잘 아는 만큼 실제로 써먹을 수 있는 정보를 알려야 한다”는 취지였다. 연구원은 산업기술정보회원제를 만들어 실비를 받고 첨단 정보를 기업들에 제공했다. 산업연구원이 대구·광주 등 지방에 지원을 만든 것도 그때다. 실제로 기업이 있는 현장에 다가가서 도와줘야 한다는 의도였다. 그 같은 ‘실용’색채가 철저한 실용주의자인 이명박 당선자와 맞아떨어지는지도 모른다.

정부를 나와 민간으로 돌아온 사공 전 장관은 활발하게 움직였다. 국제통화기금(IMF) 특별고문과 아시아·유럽 비전그룹(AEVG) 의장을 지내며 각국 정부의 고위 정책담당자들과의 네트워크를 더욱 다졌다. 93년엔 세계경제연구원을 설립했다. 그는 해외 석학들을 불러 심포지엄과 세미나를 했고, 무역협회와 공동으로 서울세계무역포럼을 운영했다. 2000년엔 대외경제통상대사를 지냈다.

민간인 사공일은 ‘세계화’와 ‘국가 경쟁력’ 연구에 초점을 맞췄다. 세계에 국경이라는 칸막이가 없어지고, 사람과 돈과 일자리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사실에 주목했다. 경쟁력을 갖추지 않고는 세계화 시대를 헤쳐나갈 수 없다는 점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세계화 시대의 발전 전략은 이 당선자의 관심 사안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그가 평소 주장해 온 국가경쟁력 강화 방안을 살펴보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나아갈 경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사공 전 장관이 대담과 세미나, 강연, 신문 기고 등에서 한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경제는 ‘복리(複利) 게임’이기 때문에 성장률 1%가 10년 뒤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은 기업하기 좋은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정치를 안정시키고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는 일들이 모두 기업하기 좋은 여건을 만드는 일환이다. 중국을 겨냥한 세계적 기업들이 우리에게 오게 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리더십의 위기다. 법치가 중요하다. 법치를존중하고 모든 행정을 투명화하는 것이 기업 활동의 거래 비용을 줄여준다. 지식기반경제 시대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교육개혁이 돼야 한다. 공교육부터 바로 서야 한다. 양극화를 해결하려면 온 국민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돼야 한다. 시대착오적인 3불(不)정책 등 은 하루속히 그만두고 경쟁과 자율에 기초한 교육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걸 맞도록 정부 간섭과 규제를 최소화해야 한다. 수도권 투자를 못하게 하면 투자가 지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미국·중국·슬로바키아까지 갈 수있다.-

사공 전 장관은 지난 15년간 여러 차례 입각 제의를 받았으나 가지 않았다. 이미 실세 경제수석과 재무장관을 지낸 그에겐 ‘자리’ 자체보다 ‘일할 여건’이 더 중요했을 것이란 분석이 있다. 이 당선자가 불러낸 ‘올드 보이 사공일’이 어떤 흑묘백묘론(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의 실용 구상을 내놓을지 지켜볼 일이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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