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책읽기]"자, 봐라"코드로 일본사 다시 읽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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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가시마 시게루1949년 요코하마 출생. 동경대 불문과 졸업. 교리쓰(共立)여자대학 교수. 전공은 19세기 프랑스소설과 사회. 『마차를 사고 싶다』로 산토리학예상, 『직업별 파리 풍속』으로 요미우리문학상(평론부문),『성공하는 독서일기』로 마이니치 서평상 등을 수상했다. 국내에 번역된 것으로는『백화점의 탄생』, 『레 미제라블』이 있다.

이 수상쩍기 그지없는 제목의 책을 펴들면서, 얼마 전 강준만 교수가 쓴 ‘욱 민주주의’라는 칼럼이 떠올랐다. 그에 의하면 최근의 선거결과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단계에는 한국인 특유의 ‘욱’하는 기질이 작용해왔다는 것이다. 이 책 역시 집단심성을 통한 역사의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파격의 지적 자극을 제공한다. 저자는 불문학자라는 본업을 가졌지만 영역을 넘나들며 일본근대사와 같은 ‘성역’조차도 거침없이 헤집는다는 점에서 가히 ‘외야 인문학’의 대표적 존재라 할 수 있다.

제목에 나오는 ‘도다’라는 일본어는 ‘자 봐라’는 뜻이다. 저자는 ‘자 봐라’를 ‘자기애에서 비롯되는 모든 표현행위’로 정의한다. 예컨대, 책을 쓰는 소설가, 무대에 선 음악가, 연설하는 정치가, 외출 시의 명품 핸드백도 모두 ‘자 봐라’에 해당된다. 사람에게는 “자 봐라, 나 굉장하지?”라는 자기현시 욕구가 있다. 경제력 ‘자 봐라’도, 학력 ‘자 봐라’도, 외모 ‘자 봐라’도 모두 인간세상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성직자의 경우에는 인격 ‘자 봐라’쯤 될 것이다.

저자는 ‘자 봐라’의 심성을 네 개로 세분해서 사이고 다카모리(西<90F7>隆盛)와 같은 일본근대사의 인물과 역사적 사건에 대입하여 해명을 시도한다. 즉 ‘자 봐라’의 심성을 표출의 양태에 따라 음·양으로 양분하고, 표출의 방향에 따라 내·외로 나누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나 어때, 굉장하지?”는 ‘양 자 봐라’이고, 이에 대한 반발로써 정신적 금욕주의를 취하는 것 역시 변형된 형태의 ‘자 봐라’, 즉 ‘음 자 봐라’이다. 나라 밖에서 규범을 빌려와 스스로가 그 규범에 가깝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은 ‘외 자 봐라’이며, 천황이나 사무라이 윤리와 같은 전통적인 가치를 주장하는 국수주의는 ‘내 자 봐라’가 된다.

ドーダの近代史 (‘자 봐라’의 근대사) 鹿島茂(가시마 시게루 ) 지음 朝日新聞社, 396쪽, 1700엔

이 책에 등장하는 일본근대사의 인물 중 저자가 가장 역점을 두는 대상은 사이고 다카모리이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사무라이 정신의 표본처럼 그려졌던 인물이 바로 그이다. 저자에 의하면 사이고는 ‘음 자 봐라’와 ‘내 자 봐라’의 전형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일본인들이 사적 욕망을 버리고 공공의 가치를 우선했던 그의 무사도적 정치윤리를 흠모한다. 막강한 화력으로 무장한 정부군 진지를 향해 필마단기로 맞서다 장렬하게 산화하는 사이고의 모습을 본 관객이라면 일본인들의 심정에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정신주의와 국수주의의 형태로 표출되는 ‘음 자 봐라’와 ‘내 자 봐라’의 심성이야말로 일본이 무모한 전쟁을 일으키게 한 동인이라고 비판한다. 무사도적 정신력만 있으면 물적 토대에서 앞서는 미국도 이길 수 있다는 일본군부의 황당한 판단도 ‘음 자 봐라’ 심성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서남전쟁의 사이고와 태평양전쟁의 일본군은 닮은꼴인 셈이다.

한 수 배웠으니 이쯤 해서 학습 성과를 피력하는 것이 독자의 도리일 터. 흔히 일본인은 겸손하다고들 한다. 부정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많은 일본인들이 ‘자 봐라’라는 자기현시의 욕망과 무관할까? 선뜻 말을 잇기가 망설여진다. 은근하고 공손한 말투와 깊숙이 숙인 고개에서 “지는 것이 이기는 것” “현실로는 지지만 정신으로는 이긴다”는 사이고 다카모리식, 가미가제(神風)식 자기애의 그림자를 본다고 말하는 순간, 스스로의 감수성과 분석력을 ‘자 봐라’하고 뽐내는 꼴이 되니 말이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만화가 도카이바야시(東海林) 사다오가 제창한 ‘자 봐라’학에 대한 학문적 실천의 성과이다. 크로스 오버는 이미 일본 인문학 출판의 중심 화두가 되었다. 인문학이 근엄한 ‘자 봐라’의 옷을 벗어던질 때라는 이야기이다.

윤상인<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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