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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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소라나 희수와 의논해봐도 특별히 이거다 할만큼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았다.대학생이 된 후에 처음 맞는 여름방학은 그래서 우리에게 또하나의 고민거리였다.
소라는 같이 여행을 떠날만큼 친한 여자친구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싱겁게 서울에서 시나 긁적이면서 까먹게 되기가 십상인 것처럼 보였다.희수는 미국의 아버지에게나 일본의 어머니에게 가볼 생각은 없다고 그랬다.그래서 자기 혼자 유럽쪽이나 한바퀴 돌고 올까 망설이고 있다는 이야기만 슬쩍 흘렸다.희수는 그런 말들이 나나 소라의 기를 죽일까봐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 같았다.
『그러지 말고 우리 다 같이 동해바다로 가서 고래나 잡고 오는 게 어때?』 『다 같이라니 누구누구…?』 내 제안에 희수가반문했는데,날카로운 질문이었다.
『그러니까 소라랑 너랑 나랑….』 『싫어.너희 둘이 가는데 내가 알리바이로 끼는 건 싫다구.』 소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쨌든 그날은 아무도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소라와 내가단둘이 피서여행을 간다는 건 내게도 모험이었다.
나는 악동들을 생각했는데,재수 중인 상원이는 자극하지 않기로했다.시시각각 다가오는 시험 날짜,생각처럼 올라주지 않는 성적,짜증스런 더위,배낭메고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증오 따위와 싸우느라고 공부는 오히려 뒷전인지도 몰랐다.수험생에게의 여름이란 그런 계절이었다.
영석이는 미국으로 배낭여행을 계획했지만 최소한의 경비조차 집에서 지원해주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집에서 자빠져 있다는 상황이라고 했다.살아있는 현장교육에 대한 학부모들의 이해부족을 질타하는 무슨 캠페인같은 거라도 있으면 자원봉사로 참 가할 생각이라고 하였다.승규에게 전화했더니 그놈은 만화에 빠져있다고 하였다. 나는 정보와 상황을 종합해서 아이디어를 냈다.동해쪽 해수욕장의 여관 하나를 세내서 우리가 아르바이트를 겸하는 거였다.
좋은 친구들과 함께 돈도 벌고 지겨운 여름도 때우는 일석삼조의기발한 발상이었다.영석이와 승규가 우선적으로 내 아 이디어에 존경의 뜻을 표했다.
소라와 희수를 같이 만나서 내 계획을 발표했다.
『당장 밑천이 있어야 여관을 빌리지.』 소라가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하였다.
『각자가 재주껏 백만원씩만 꿔오는 거야.곧 갚을 수 있다니까그러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아버지는 학생이 돈맛부터아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황당한 말씀만 하셨다.그렇지만 어머니는 이자까지 높이 쳐서 드리겠다고 하니까 어느 정도 마음이 흔들리는 모양이셨다.
윤찬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바로 그런 즈음이었다.
『미안해.다리 하나가 나가버렸어.구례 정형외과라는 병원이야.
…아니야,집엔 알리고 싶지 않다니까.와주겠니…?』 『잘됐어.그렇지 않아도 방학인데… 갈 데가 없어서 고민했었거든.』 윤찬은등반하다가 떨어져서 오른쪽 다리가 부러져버렸다고 했다.나는 윤찬이 겪고 있는 방황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책임을 느꼈다.영석이와 승규에게 전화를 걸어서 동해행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걸통보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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