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더 많이 공부했다고 점수 깎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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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올 대입 수학능력시험 과학탐구 물리Ⅱ의 11번 문제를 둘러싼 혼란에는 현행 제도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압축돼 있다. 불합리한 수능 등급제, 찬밥 신세가 된 수월성(秀越性) 교육, 당국의 무책임과 행정 편의주의가 애꿎은 학생들만 피해자로 내몰고 있다. 더 열심히 공부해 올바른 답을 고른 학생이 오답 판정을 받아 불이익 받는 사태가 정상인가.

11번 문제는 질문에 나오는 이상기체(理想氣體) 분자의 원자가 하나인지 둘 이상인지를 명확히 하지 않았기에 처음부터 잘못된 출제다. 그런데도 교육과정평가원은 “고교 교육과정에서는 단원자(單原子) 분자만 다루므로 질문도 단원자를 전제로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발뺌했다. 고교 이상의 물리 실력을 갖춘 수험생이 손해 봐도 할 수 없다는 태도다. 이런 나라에서 과학 영재가 나올 수 있겠는가. 선진국에서는 보편화된 선행·심화학습이 우리 교육당국 눈에는 죄악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더구나 일부 고교 교과서에서는 다원자 분자도 다루고 있음이 확인됐다. “수능은 60만에 가까운 학생이 보는 보편적 시험”이라는 궤변에는 더 할 말을 잊게 된다. 한국물리학회가 회의까지 열어 “복수 정답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는데도 제대로 반박도 못 하면서 귀만 막고 있다.

물리Ⅱ 과목에는 1만9597명이 응시했다. 교육부와 평가원은 복수 정답으로 처리할 경우 이미 끝난 수시모집과 현재 진행 중인 정시모집에 큰 혼란이 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무책임한 행정 편의주의다. 과거처럼 원점수가 있든가 최소한 표준점수라도 공개한다면 잘못을 속히 바로잡을 수 있겠지만 현 등급제에서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잘못된 교육제도의 파장이 이토록 크다. 당국은 제도의 신뢰성이니 안정성이니 하는 말을 입에 담을 자격도 없다. 대규모 소송 사태가 초래되기 전에 복수정답을 솔직히 인정하고, 피해 학생 구제책을 최대한 빨리 강구해 실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