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과주말을] 140권 번역 솜씨로 쓴 ‘내 목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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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지하철 헌화가
이종인 지음, 즐거운상상, 280쪽, 1만원

삶에 대한 건강한 에너지가 뚝뚝 묻어나는 산문집이다.

전문 번역가인 저자는 “누르고 눌렀던 어떤 생각이 내 안에서 흘러 넘쳐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때 그것을 나의 목소리, 나의 언어로 구체화시키려 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렇게 10여 년 동안 쓴 글 20여 편을 모아 엮은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니, 마감에 쫓겨 무르익지 않은 생각을 짜낸 글과는 격이 다르다. 첫사랑의 추억, 아내에 대한 고마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직업과 사랑에 대한 철학 등을 맛깔나게 풀어놨다. 거기에다 동서양의 고전을 꿰뚫는 저자의 방대한 교양까지 글 켜켜이 녹아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아내가 아팠을 때의 에피소드다. ‘암일지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이 시작됐다.

“나 혼자서 인생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너무나 막막해졌다. 참으로 우스꽝스럽게도, 화장실 바닥에 물이 차면 누가 물을 빼주느냐는 생각부터 났다.”(47쪽)
 다행히 “난 암이래도 겁나지 않아”라며 투병의지를 밝혔던 아내는 완쾌됐다. 저자는 아내의 말에서 로마시대 여인 아리아가 남긴 유언 “파에테, 논 돌레트”를 떠올렸다. 아리아의 남편 세시나 파에투스는 황제로부터 자결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자결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처형대의 칼에 무자비하게 찔려 죽게 될 처지였다. 아리아는 파에투스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권했다. 하지만 파에투스에게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가 없었다. 결국 아리아가 용기를 낸다. 남편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단도를 꺼내 자신의 가슴 깊숙이 찌르고는 남편을 향해 “파에테, 논 돌레트(여보, 아프지 않아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번역가란 직업에 대한 이야기도 진솔하게 펼쳐진다. 저자가 번역만 하며 살기로 결심한 게 1994년 봄이었다. 직장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어머니와 아내는 난감해했다. 하지만 연말이면 예금 계좌에 찍히는 번역수입 누계가 여덟 자리를 유지하면서 “남자는 모름지기 밖에 나가서 일을 해야지”란 아내의 말은 쑥 들어갔단다.

저자의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은 부러울 정도다. “생의 의욕을 번역에서 느끼다”며 “번역 일을 하는 중에 세상을 떠나고 싶다”고까지 말한다. 그 동안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못 읽는 여자』 등 140여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는데, 그가 번역한 책을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긴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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