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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살아도 일자리 줄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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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제는 경제'라는 시국선언에 서명한 전국의 경제.경영학 교수들이 한달 만에 벌써 1천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웬만한 대학의 경제학.경영학 교수들은 거의 서명 대열에 선 셈이다. 서슬퍼런 군사정권 당시의 민주화 시국선언처럼 신상의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이번 교수들의 서명이 대수로울 게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좁은 나라에서 경제학.경영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1천명씩이나 뭉쳤다는 게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이들의 시국선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경제를 살리자'는 것이다. 대통령과 정치인.정부 관료.기업가.노조 지도자들 모두에게 '이제는 제발 만사 제쳐놓고 경제부터 살려놓고 보자'는 주문이다. 시국선언치고는 그다지 거창하게 들리지 않지만 몇몇 교수들이 비장한 심정으로 시국선언을 '모의'하고, 여기에 많은 교수가 공감한 데는 절절한 사연이 있다.

서명에 참여한 한 경제학 교수는 "경제를 배운 제자들이 취직을 못해 사회의 첫발을 실업자로 내딛는 현실 앞에 무슨 경제이론이 필요하겠느냐"고 자책했다. 상아탑 속에서 경제.경영학 이론을 가르쳐온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냉혹한 경기침체의 현장을 직접 경험한 끝에 나온 절실한 바람이었다.

지난해 말 우리나라의 전체 실업률은 3.6%, 15~29세 청년실업률은 8.6%였다. 전체 실업률은 선진국에 비하면 그럭저럭 견딜 만하지만 젊은이들의 실업은 심각한 수준이다. 그나마 취업자의 절반 이상이 임시직이나 일용직이다.

대학을 나온 20대로 범위를 좁혀보면 실질 실업률이 20.9%(노동연구원 추산)로 높아진다. 5명 중 1명이 일자리를 얻지 못해 놀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는 취직을 못해 학교를 더 다니거나 군대에 간 대졸자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대학에는 기를 쓰고 들어가려고 안간힘인데, 막상 졸업하면 이들이 갈 만한 일자리는 거꾸로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 대졸 실업자가 늘어나는 게 당연하다. 대기업.공기업.금융회사 등 대졸자들이 찾는 번듯한 일자리는 외환위기 이후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지난 5년 사이 20%(32만개)나 없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눈높이를 낮춰 중소기업에 가면 되지않겠느냐고 하지만 중소기업의 사정은 더 딱하다.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면서 타격이 큰 곳이 내수(內需)에 목을 매고 있는 중소기업들이다. 문닫지 않고 버티는 것만도 버거운 판에 고학력 신입사원을 더 뽑는다는 건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문제는 앞으로 정부의 장담대로 경기가 살아난다 해도 일자리가 단번에 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지난해 우리 경제가 부진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연간 3% 가까이는 성장했다. 그러나 일자리는 3만개가 줄었다. 경제규모가 커졌는데도 일자리가 줄었다는 것은 산업구조가 바뀌고 있다는 증거다. 사람을 많이 쓰는 산업은 쇠퇴하는 반면, 새로 들어서는 첨단산업에서는 기계가 일을 다 한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앞으로 성장률이 높아진다고 해서 일자리가 자동적으로 확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경제를 어떻게 살리느냐에 따라 일자리는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다. 어떤 일자리를 만드느냐도 문제다. 경제를 살리자는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는 5년, 10년 후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에게 무슨 일자리를 줄 것인지 고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