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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시시각각

넘어진 김에 쉬어 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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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그러나 이 분들은 초(超)고위험·고수익이라는 대권 벤처사업에 덤벼들다 넘어졌으니 그리 안쓰러워할 것까지는 없다. 딱 열흘 남은 올 한 해, 벤처는커녕 그저 착실하게 생을 영위했을 뿐인데도 억울하게 쓰러지고 넘어진 사람이 훨씬 많으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자마자 우수수 추풍낙엽처럼 쓰러진 청년 실업자, 주택담보대출 금리 폭등에 등골이 휜 가장이 어디 한둘인가. 서해 기름유출 사건으로 절망에 빠진 어민들은 또 어떤가.

한국의 중년에겐 사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넘어지는’ 일의 연속이다. 한 남자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생들이 몇 년 전 나이 50을 맞이한 기념으로 자체 설문조사를 했다. 세 가지 조건을 내걸고 이를 전부 충족시키는 동창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첫째, 가족 중 지병이 있거나 사별·이별한 사람이 없을 것. 둘째,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아이들이 제 나이에 맞게 학교에 다니고 있을 것. 셋째, 수입이 많든 적든 현재 하는 일이 있을 것. 모두 당연하고 평범해 보이는 조건인데도 셋 다 충족시킨 동창생은 겨우 10%였다고 한다. 그러니 넘어지고 쓰러졌다 해서 자기만 특별히 불행하다고 생각할 일이 아니다.

나는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는 말을 좋아한다. 바로 일어나려고, 오뚝이처럼 원상 회복하려고 아등바등대지 말고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히 먹는 게 나을 때가 많다는 말이다. 숲 해설가 양경모(49)씨는 1998년 외환위기 사태 와중에 넘어졌다. 다니던 종합금융회사가 망했기 때문이다. 생계 대책에도 위협을 느끼던 중 우연히 자연 체험의 세계에 눈뜨게 됐다. 두 아이를 데리고 우리나라 자연체험 학교의 원조로 꼽히는 두밀리 자연학교(경기도 가평) 캠프에 참가한 일이 계기였다. 두밀리 학교는 농촌운동가·교육자이자 ‘ET 할아버지’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채규철씨가 세운 학교다(채씨는 지난해 12월 별세했다). 숲 해설가로 변신한 양씨는 요즘 숲 해설 강사들을 가르치는 한편 자연체험 교구(敎具) 업체를 운영하며 아주 즐겁게 지내고 있다.

기자 생활을 20년 넘게 한 서명숙(50)씨는 2003년 쓰러졌다. 취재 경쟁과 원고 마감에 쫓기고 술·담배에 찌들어 망가진 기계 같던 몸을 추스르기 위해 담배부터 끊고 직장마저 그만뒀다. 스스로를 ‘다 파먹은 김장독’ 같다고 느끼던 서씨가 택한 것은 스페인의 유명한 ‘순례자의 길’ 도보 여행이었다. 지난해 9월 10일부터 36일간 800㎞를 걸었다. 귀국한 뒤 고향인 제주도에서 걷기 사업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사단법인 제주 올레(제주도 말로 ‘집으로 통하는 좁은 길’이란 뜻)를 만들었다. 올여름 서귀포 일대 200㎞를 샅샅이 뒤진 끝에 두 개의 걷기 코스를 개발했다. 요즘 이 올레는 옛길·오솔길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 과속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 사이에 인기다.

누구나 유년 시절 엎어지거나 넘어진 기억이 있을 것이다. 엎드린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다 보면 평소 못 느끼던 다른 세계가 다가온다. 코끝을 간질이는 흙내음·풀내음, 바삐 기어다니는 개미들, 정적 특유의 ‘지잉’ 하는 소리도 만날 수 있다. 몸을 뒤집으면 뭉게구름이 하늘 가득이다. 어른이라고 얼마나 다를까. 여느 때는 알지 못하던 것들을 넘어지고 나서야 감지하는 경우가 많다. 양경모씨나 서명숙씨처럼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다면 큰 복에 속한다. 세상에는 의외로 아프고 서러운 사람이 많고, 그러니까 서로 사랑하고 도와야 한다는 진리를 되새기기만 해도 어딘가. 올 한 해 많이들 넘어지셨는지, 굳이 버둥댈 것 없이 좀 쉬어 가자. 곧 새해가 밝아 오니까.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