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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하이마트 인수한 유경선 유진 회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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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 18면

이찬원 중앙일보시사미디어 기자

건빵회사로 출발한 유진기업이 매출 2조3000억원대의 전자유통업체인 하이마트를 인수해 단박에 재계 30위권으로 뛰어올랐다. 인수합병(M&A)의 기린아로 주목받는 유경선 회장은 어떤 지렛대(레버리지)로 이 같은 대도약을 이뤘을까. 유진과 비슷하게 재계의 신화로 거론되는 STX그룹과 비교해 그 성장사를 살펴봤다. <편집자>

‘키우고, 팔고, 사는’ 전술 건빵회사 → 30대 그룹

그리스에서 인도까지 점령한 알렉산더는 고민에 빠졌다. 이제 깃발을 내리꽂고 지역 거점을 강화할 것인가, 아니면 영토를 더 넓힐 것인가가 문제였다. 후대의 전략가들은 이를 ‘알렉산더의 딜레마’라고 불렀다. 정작 역사 속에서 알렉산더는 거침이 없었다. 풍토병에 걸려 서른셋의 나이에 쓰러질 때까지 그는 쉼없이 진군했다. 알렉산더 딜레마에서 본인은 자유로웠던 셈이다.

비즈니스 세계의 알렉산더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 본래의 핵심사업을 강화할 것인가, 아니면 외연 확대에 나설 것인가. 쉬운 결정일 수 없다. 핵심사업에만 집중하다간 시장 트렌드에 뒤처질 수 있고, 그렇다고 새 사업에 발을 잘못 디뎠다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비즈니스 알렉산더’의 딜레마

9일 유진기업 컨소시엄은 국내의 대표적 전자유통 회사인 하이마트를 1조9500억원에 인수했다. 미국계 사모펀드인 어피니티파트너스(AEP)가 투자했던 하이마트는 KT가 먼저 인수를 시도했으나 가격이 맞지 않아 중도에 포기했던 회사다. 이번 인수전에선 GS·롯데 등이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유진을 당하지 못했다. 그만큼 몸값이 비쌌다는 지적에 대해 김재식 유진그룹 부회장은 “당초 3조원까지 쓸 작정이었다”며 여유를 보였다.

대우건설 인수전에서 고배를 마신 후 특유의 ‘포식 본능’을 발휘하는 것일까. 유진의 인수합병(M&A) 행보가 날쌨다. 지난 3월 유경선 회장(사진)은 “제조업체의 꿈은 바로 금융회사를 갖는 것”이라며 1761억원을 투자해 서울증권 인수를 마무리지었다.

곧바로 로젠택배(인수가 300억원)·한국통운(200억원)·한국GW물류(40억원)를, 이번엔 하이마트까지 낚았다. 10개월여 만에 2조2000억원에 가까운 M&A를 성사시켰으니 ‘유진의 알렉산더’인 유 회장 역시 거침없는 도전을 선택한 셈이다.

여기서 유진식(式) M&A가 재계의 시선을 끈다. 다섯 건의 ‘속사포 M&A’를 성사시키면서 유진이 실제 쏟아 부은 돈은 4000억~5000억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증권과 로젠택배를 사들이는 데는 2100여억원이 들었다. 한국통운은 200여억원의 부채를 해결해준다는 조건으로 인수했다. 한국GW물류(40억원)의 인수 주체는 로젠택배이니까 유진 주머니에서 나간 돈은 아니다.

‘유통 거물’ 하이마트를 품에 안는 데에도 2000억~3000억원이 든 것으로 보인다. 대신증권 송세훈 애널리스트는 “인수가격 1조9500억원 중 절반은 차입으로, 나머지는 하이마트를 인수하는 특수목적법인(SPC)에 전략적 투자가들과 함께 출자하는 형태”라며 “유진은 2000억~3000억원을 들이면 SPC의 최대주주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유진그룹 매출은 7800여억원. 올해는 1조2000억원으로 뛸 것으로 전망한다. 여기에 하이마트(2조3000억원)를 더하면 3조5000억원대가 된다. 유 회장은 “내년 그룹 매출 4조원에 영업이익 2500억∼3000억원을 달성하겠다”고 말했다. 금융·유통·물류에 걸쳐 재계 30위권 대기업으로 키우면서도 비교적 실속있는 투자를 한 셈이다.
이런 ‘알뜰한’ 실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일단 회사가 알토란 같다. 유진은 유 회장의 부친인 유재필 명예회장이 1969년 설립한 영양제과공업이 모태. 창업 초기엔 군납 건빵으로 큰돈을 벌었다. 레미콘 사업에 뛰어들며 유진기업을 세운 것이 84년이다. 유 회장은 이순산업 같은 또 다른 레미콘 회사를 세워 유진기업과 ‘경쟁’시키며 회사를 키웠다. 이런 경쟁 시스템으로 후발주자로 출발했지만 유진은 92년 레미콘 업계 1위에 오른다.

유진이 본격적으로 M&A 시장에 이름을 올린 것은 2004년. 고려시멘트를 인수해 수직계열화를 이뤘다. M&A 행보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대우건설 인수전에 뛰어들면서다. 2005년 8월 유 회장은 그룹 수뇌부를 서울시내 모처로 불러 “레미콘 사업의 미래가 불투명해 고심하던 와중에 두산이 중공업 사업으로 전환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대우건설을 인수하겠다”고 선언한다. 당시 유 회장의 의지가 워낙 적극적이어서 오전 6시에도 ‘작전회의’를 했다고 한다.

M&A 종자돈은 드림씨티방송에서 나왔다. 97년 유진은 부천·김포 일대에서 케이블TV(SO) 사업에 진출하면서 드림씨티방송·브로드밴드솔루션즈를 세운다. 유 회장이 700억원대 자금을 투입해 광통신망을 구축하면서 드림씨티는 아시아 최고 수익률을 내는 케이블TV 회사로 성장한다. 회사 관계자는 “영업이익률이 30%대에 이르는 알짜배기”라고 말했다. 유진은 지난해 6월 이 회사를 CJ홈쇼핑에 넘기면서 3981억원을 챙겼다. 드
림씨티가 유 회장의 ‘드림’을 이루는 데 레버리지가 된 셈이다.

거칠 것 없는 영토 확장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유진이 하이마트 인수를 발표한 이틀 뒤 한국신용평가는 유진기업·고려시멘트·기초소재 유진 계열사의 신용등급을 ‘미확정 검토’ 대상에 올렸다. 현재 3개사는 투기등급(BB+이하) 바로 위에 있어 자칫 투자부담이 높아질 수 있다. 한신평 측은 “인수대금이 유진의 자본 규모 및 유동성과 대비해 과도한 수준”이라고 밝혔다.

어쨌든 유진의 행보는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유 회장은 “자본시장통합법 발효에 대비해 금융회사를 더 인수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김재식 부회장 역시 “신수종 사업 발굴을 위해 적극적으로 M&A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내부유보, 증자대금 등을 더하면 유진의 투자여력이 수천억원대에 이를 것이란 분석이다. 증권가에서는 서울증권만 해도 2000억원대 ‘실탄’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핵심은 ‘미래가치’

유진이 ‘키워서 팔고 다시 사는’ 타입이라면, 최근 엄청난 속도로 몸집을 불린 STX는 ‘일단 사들인 다음 회사를 띄워서 투자자금을 회수하는’ 유형이다.

지난 10월 세계 최대 크루즈선사인 아커야즈 주식 39.2%를 사들여 화제가 된 STX그룹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일관된 흐름의 M&A 행보로 주목받는다. 델리게이트M&A의 황호승 사장은 “STX는 서로 보완관계가 있는 사업체만 사들이고 있다. 이것이 과거 문어발식 확장에 치중했던 재벌과 대비된다”고 말했다. STX 관계자는 “시너지가 큰 연관산업 진출을 통해 조선·해운 전문기업으로 도약한다는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STX의 M&A는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 당시 대주주였던 쌍용의 지분 매각으로 쌍용중공업(현 STX)이 M&A 시장에 나왔다. 신용위험기업으로 지정돼 퇴출 판정이 내려졌던 상태였다. STX는 당시 강덕수 전무가 한누리투자증권의 자금을 수혈받기까지 앞날을 전혀 기약할 수 없는 형국이었다.

이후 STX 대표이사에 취임한 강 회장은 선수금 500억원, 일본 니쇼이하이상사로부터 100억 엔대 외자 등을 바탕으로 유동성 위기를 해소한다. 회사가 안정되자 평소 관심이 있던 조선사업에 눈을 돌렸다. 마침 M&A 시장에 나온 대동조선(현 STX조선)을 1000여억원에 인수했다. 여기서부터 재무전문가 출신인 강 회장의 M&A 스타일이 돋보인다. HSBC은행으로부터 투자를 유치(400여억원)하고 기업공개(IPO)를 통해 STX는 1400억원대 자금을 확보한 것이다.

범양상선(현 STX팬오션) 인수 때도 강 회장의 금융 노하우가 십분 발휘됐다. 2004년 11월 STX는 4200억원을 들여 STX팬오션을 인수했다. 그리고 10개월 후 이 회사를 싱가포르 증권시장에 상장시켜 3800억원을 회수한다. 한 M&A 중개회사 대표는 “강 회장은 당시 국내보다는 해운회사 주식가치를 후하게 쳐주던 해외시장을 물색했다”며 “이것이 M&A 베테랑으로서 그의 숨은 실력”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일단 인수한 후 투자유치, IPO 등을 통해 투자자금을 즉시 회수하는 것이 STX식 M&A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한편 강 회장은 회사에서 받은 스톡옵션과 20억원대의 사재를 털어 STX(옛 쌍용중공업) 지분을 인수했다. 당시 쌍용중공업 주가가 800원에 불과해 큰돈이 들어가지 않았다. 상고·야간대 출신의 샐러리맨이 재계 20위권의 오너가 된 것이다. 벼랑 끝에 몰렸던 회사는 7년이 지난 현재 44배나 성장해 매출 13조원을 바라보고 있다.

스타일은 뚜렷하게 구별되지만 STX와 유진의 M&A에는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 미래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최근 M&A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두산이나 STX·웅진·유진 같은 기업들은 가장 먼저 미래가치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며 “연관사업과 시너지가 있다고 판단하면 과감하게 베팅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하이마트 인수만 해도 유진은 레미콘 공장 유휴지, 물류시설 등을 활용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계산을 했다. 유 회장은 “하이마트 M&A를 염두에 두고 물류회사 인수를 추진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인수=비단길’ 성립 안 해

그러나 새로운 길이 언제나 비단길은 아니다.

중앙아시아·아프리카 시장을 개척하면서 ‘김우중+칭기즈칸’이란 뜻의 ‘킴기즈칸’으로 유명했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애초 별명은 ‘인수왕’이었다. 그는 40여 개의 계열사 중 절반 이상을 인수를 통해 ‘대우가족’으로 끌어안았다. 한국기계·옥포조선(현 대우조선해양)·대우자동차(현 GM대우자동차) 같은 간판회사들이 그렇게 성장했다. 서울역 앞 대우센터도 골조만 앙상했던 정부 소유의 교통빌딩을 떠안은 것이다.

당시 부실 기업을 인수하면서 김 전 회장은 ‘남의 돈’을 끌어쓰는 방법을 썼다. 대출원금 상환유예는 기본, 경우에 따라선 원금까지 탕감받는 특혜를 안았다. 가령 경남기업을 인수하는 대가로 2000억원을 받았는데, 대우는 이 돈을 자동차 시설 확대에 썼다. 그의 거침없는 M&A는 유럽·아시아까지 이어졌지만 빚 위에 지어진 거대한 성(城)은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

물론 최근의 M&A 흐름은 특혜성 인수, 부실기업 떠안기와는 분명히 성격이 다르다. 그러나 ‘인수 성공=비단길’이 아니라는 단순한 교훈은 아직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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