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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남기자의영화?영화!] 퇴고 거듭한 ‘블레이드 러너’ 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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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블레이드 러너’(사진)를 다시 스크린에서 봤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82년 작입니다. 미국에서 스필버그 감독의 ‘ET’와 나란히 개봉했다가 흥행에 참패한 작품이지요. 대신 SF 팬들에게 재발견돼 걸작 반열에 올랐습니다. 비디오 대여점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꼭 봐야 할 비디오’ 목록에 으레 꼽히곤 했지요. 저도 그렇게 비디오로 봤습니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이른바 파이널컷(결정판) DVD 출시를 앞두고 상영회가 열린 덕분입니다. 92년에도 극장판과 결말이 다른 디렉터스컷(감독판)이 만들어진 적 있는데, 이번 파이널컷은 이런저런 장면을 추가·삭제했고, 결말은 다시 82년판과 비슷해졌다고 합니다. 파이널컷은 올 베니스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지요. 사반세기에 걸쳐 퇴고를 거듭하는 것을 보면 이 영화에 대한 감독의 애착을 짐작할 만합니다.

다시 보니 역시 애착을 가지고도 남을 만했습니다. 인간을 꼭 닮은 로봇, 즉 레플리컨트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상상력이 지금에도 놀라웠습니다. 비주얼 역시 이후 만들어진 숱한 SF 영화에 미친 영향력이 새삼 떠오를 정도였고요.

제 기억력도 놀라웠습니다. 엊그제 잡은 약속도 곧잘 까먹는 편인데, 지난 세기에 본 이 영화의 주요 장면이 생각나더라는 거죠. 특히 탈주한 레플리컨트의 두목, 노랑머리 로이(룻거 하우어)가 빗속에 고개를 떨구며 숨지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린 기억까지 되살아났습니다. “난 사람들이 믿지 못할 놀라운 것들을 봤지… 그 순간들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사라지겠지만.” 어느 인간보다도 인간적인 명대사를 읊는 장면입니다.

전혀 엉뚱하게 기억했던 대목도 있더군요. 저는 레플리컨트가 인간이 되고 싶어했던 걸로 기억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불과 4년뿐인 수명을 늘리고 싶어했던 거죠. 인간의 기억이란 참으로 신통하기도 하고, 수상하기도 합니다.

기억은 인간과 레플리컨트를 구별짓는 특징입니다. 다른 레플리컨트와 달리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갖고 있는 레이첼(숀 영)은 자신이 레플리컨트인 줄 모릅니다. 실은 어느 인간의 기억을 이식한 것인데, 레이첼은 자신의 기억이라고 철썩 같이 믿습니다. 기억을 이식해 레이첼 같은 최신 기종을 만든 이유가 있습니다. 스스로 감정을 발전시키도록 설계된 레플리컨트가 나중에 겪게 되는 문제를 ‘기억’이라는 요소가 완충시켜 준다나요. 기억뿐이겠습니까. 골치 아픈 인생사에 망각 역시 인간에게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은 필립 K 딕의 단편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68년)입니다. 반세기 전의 원작소설이, 사반세기 전의 영화가 묘파한 인간에 대한 성찰이 섬뜩할 따름입니다. 소설과 영화가, 극장판과 디렉터스컷·파이널컷이 어떻게 다른지 조목조목 묻지는 마세요. 보신대로, 제 기억력이 좀 그렇거든요.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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