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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k holic] 제주도, 그 섬엔 ‘올레’가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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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800㎞의 대장정을 마친 그녀는 스페인의 ‘땅끝 마을’ 피니스테레에서 고향 제주를 얘기했다. “돌아가면 내 고향 제주도를 두 발로 차근차근 밟아 보리라. 막힌 길은 돌아서 가고, 끊어진 길은 이어 가면서 길을 내어 보리라. 가파른 속도와 전쟁 같은 일상에 지친, 논스톱으로 달려온 인생에 쉼표를 찍고 싶은 사람들이 위안을 얻고 휴식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산과 바다와 오름과 중산간이 두루 어우러진 길을.”(본지 2007년 2월 16일자 W14면)

 사단법인 제주올레는 그렇게 태어났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프랑스 생장피에서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가는 ‘순례자의 길’)를 걷고 돌아온 서명숙씨를 주축으로, 제주에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을 받으면서 걸을 수 있는’ 카미노(길)를 내는 모임이다. 올레는 제주도 말로 ‘집으로 통하는 아주 좁은 길’이란 뜻.

 올 9월 말미오름~성산 일출봉~섭지코지를 잇는 제1코스가 개발됐고, 10월 쇠소깍에서 정방·천지연폭포를 거쳐 외돌개까지 가는 제2코스가 나왔다. 서씨는 “제2코스가 통과하는 보목리는 따뜻한 제주에서도 가장 따뜻한 동네”라며 “겨울 걷기 코스로는 최고”라고 말했다. 그의 추천을 받아 제2코스로 ‘겨울 제주’를 걸었다. 서씨는 3시간30분~4시간 코스라고 했지만, 사진 찍고 메모하며 쉬엄쉬엄 걷다 보니 여섯 시간을 훌쩍 넘겼다.

<제주>글·사진=김한별 기자

제주올레 제 2코스의 종착점인 외돌개.

쇠소깍~보목항 ▶ 오름에 오르면 서귀포 앞바다가 한눈에

 쇠소깍은 한라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과 서귀포 앞바다가 만나는 곳이다. 이 때문에 간·만조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진다. 만조 때는 민물·바닷물이 합쳐져 수심이 5m 이상 올라가고 간조 땐 계곡 밑 바위가 드러날 만큼 물이 빠진다. 쉽게 접하기 힘든 비경이지만, 그런 지형 특성 때문에 지난가을 태풍 나리 때 큰 피해를 봤다. 아직도 그 때 부서진 목조데크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쇠소깍에서 효돈항·소금막(효돈항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 쉼터)을 지나면 또 하나의 절경이 나온다. 전경이 지키는 해안 초소 앞에 펼쳐져 있는 돈나무 군락지는 세찬 바닷바람에 모든 나무가 모로 누워 있어 특히 이색적이다.

 이곳에서 좀 더 들어가면 보목항 못 미쳐 큰 집이 하나 나온다. 얼핏 서울 성북동·평창동의 ‘저택’을 연상시킬 만큼 담장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해풍이 폐에 좋다고 고 이주일씨가 투병 기간 머물렀다는 별장이란다. 이씨의 별장 담장이 끝나는 곳에 제지기 오름 푯말이 나온다. 정상까지 오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15분 남짓. 보목항과 섶섬, 서귀포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보목항~소정방폭포 ▶ 전형적인 제주 얼굴

 보목항에서 해안가를 따라 보목리 마을로 들어서면 전형적인 ‘제주의 겨울’을 만날 수 있다. 구멍 숭숭 난 검은 현무암을 쌓아 올린 나지막한 돌담, 그 위로 가지를 늘어뜨린 감귤나무, 그 가지 한 가득 매달린 샛노란 감귤……. 구불구불 이어지는 올레 사이로 마을 주민들의 집과 과수원이 하나로 섞여 있다.

 보목리 마을을 빠져나오면 서귀포 하수종말처리장이 나온다. 하수처리장이라고 인상부터 쓸 필요는 없다. 해안 쪽 풍광은 어느 공원, 어느 관광지 못잖다. 넓은 풀밭에 쉼터, 갯바위까지 내려갈 수 있는 산책로도 있다. 냄새? ‘핵심 구역’ 딱 한 곳을 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하수종말처리장 뒷문을 빠져나오면 길은 국궁장인 백록정을 지나 서귀포 KAL호텔, 제주 파라다이스호텔로 이어진다. 파라다이스호텔을 끼고 해변가로 내려서면 소정방폭포가 나온다. 정방폭포와 같이 바다로 떨어지는 폭포다. 규모는 훨씬 작아 이름(小) 그대로다. 처음 봤을 땐 폭포라는 이름이 무색했을 정도. 하지만 빼어난 주변 절경과 어우러지니 오히려 아담하고 고와 보인다.

소정방폭포~외돌개 ▶ 화가 이중섭의 낙원

 

소정방폭포를 빠져나와 큰길을 건너면 서귀포초등학교를 지나 이중섭 화백이 머물던 집, 미술관이 나온다. 처음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애걔, 이게 뭐야’. 이 화백이 서귀포에서 산 기간은 딱 1년. 그때의 흔적이라곤 세 들어 살던 초가집 방 한 칸(4.70㎡), 부엌 한 칸(6.39㎡)뿐이다. 오늘날 ‘최고로 비싸게 팔리는’ 작가의 흔적치곤 초라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서귀포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던 그의 생전 회고를 생각하면 가슴이 짠해진다.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살아야 했던 천재 화가에겐, 작고 초라할망정 네 가족이 함께 살았던 초가집 단칸방이 지상 최고의 낙원이었으리라. 언덕 위 미술관도 마찬가지다. 허름한 외관에 소장 작품이라곤 작은 소품류가 전부다. 하지만 ‘살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야 했던 부인이 이 화백에게 보낸 절절한 편지는 그 어떤 대작보다 큰 감동을 준다.

 이중섭미술관을 빠져나와 길 건너 나폴리호텔을 끼고 기정(절벽) 길을 내려가면 천지연폭포 주차장이다. 이곳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언덕을 오르면, 남성리 마을을 지나 외돌개에 닿는다. 여유가 있다면 주차장 반대편 생수궤 길을 걸어도 좋다. 차는 들어갈 수 없는 울창한 난대림 숲길이 이어진다. 유명 관광지인 외돌개의 북적임이 싫다면 목전에 있는 찻집 ‘솔빛바다’ 아래쪽 송림 길까지만 가도 좋다. 숲이 끝나는 절벽 앞 벤치에 앉으면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맞은편 절벽과 외돌개의 풍광을 호젓하게 감상할 수 있다.

■길 찾기=제주올레 홈페이지(www.jejuolle.org, 064-763-0852)에서 포인트별 상세 가이드를 얻을 수 있다. 현지에선 무조건 파란색 화살표만 좇아가면 된다. 담벼락, 전신주, 보도 블록 가리지 않고 ‘헛갈린다 싶으면’ 나타나 길을 알려 준다.

■놀거리=쇠소깍에서 제주도 전통 뗏목인 테우를 탈 수 있다. 30분에 성인 5000원. 010-
6530-3002. 이중섭미술관 입장료 1000원, 천지연·정방폭포는 각 2000원씩.

■준비물= 바닷바람을 막을 수 있는 재킷 차림이 좋다. 트레킹화나 운동화 필수. 비포장 구간은 그리 많진 않지만, 오르락내리락 경사로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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