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뒷북 조사하는 경찰 '힘센 분'은 일본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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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항공안전본부의 안전 규정에 따르면 비행기에 탑승한 승객들은 이착륙 시 반드시 등받이를 세워야 한다. 비상시에 뒤 좌석의 승객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통로 공간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본인의 안전을 위해서도 이 규정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등받이를 젖혀 누워 있으면 이착륙 때의 충격으로 척추 같은 곳을 다칠 수 있어서다. 이런 규정은 전 세계 항공사에서 공통으로 적용되는 글로벌 스탠더드다. 비행기를 처음 타는 어린아이도 이 정도는 알고 잘 지킨다. 일종의 시민의식인 셈이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후보 시절 후원자였던 태광실업 박연차(62) 회장에게는 이런 안전규정이 무시해도 좋을 종이쪽지에 불과했다. <중앙일보 12월 5일자 12면>

비즈니스석에 있던 그는 "등받이를 세워 달라"는 대한항공KE1104편 승무원에게 욕설을 한 데다 서면 경고장까지 찢으며 비행기 운항을 1시간이나 지연시켰다. 120명의 승객은 이로 인해 일정에 차질을 빚었고, 항공사는 기름이 낭비돼 큰 손해를 보았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른 승객에게 피해를 준 그의 이런 행동은 엄벌해야 한다. 현행 '항공 안전 및 보안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5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려야 한다. 하지만 경찰은 웬일인지 이날 조용히 있었다. 평소 기내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휴대전화를 사용한 승객을 입건했던 깐깐한 경찰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더욱이 그는 항공기에서 쫓겨난 뒤에도 공항 청사 의전실을 돈도 내지 않고 사용할 정도로 위세가 당당했지만 누구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경찰은 사건 하루 뒤인 4일 오후 뒤늦게 "기장과 승무원을 불러 조사한 뒤 위법 사실이 밝혀지면 박 회장도 조사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회장은 5일 오후 일본으로 출국했다.

박 회장은 노 대통령의 든든한 후원자 라는 배경 때문인지 소란을 피우고도 큰소리를 쳤다. 엄격하게 법을 집행해야 하는 경찰이 오히려 미적대는 현실을 보며 국민은 착잡하다.

한 독자는 "다른 평범한 승객이 이런 소란을 피웠으면 가만 두었겠느냐. 사회의 지도층 인사라는 사람에게 더 엄격하고 공정한 잣대를 들이대는 사회는 언제쯤 오겠느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강진권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