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소년에게 엄마가 돼주는 막장인생 여자를 연기한 김혜수. [김상선 기자]
지금 충무로에서 김혜수는 최고다. ‘타짜’ 이후 연속 4편에 출연하며 스타성과 연기력을 두루 인정받고 있다. 특히 남성에게 복속되지 않는 주체적 관능이라는 점에서, 한국 여배우 섹슈얼리티의 지평을 한 단계 넓혔다는 평이다. 나이 들면 적당히 재벌가 안주인으로 주저앉기 보다, 제 이름만으로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여배우상을 보여주리라는 기대도 크다.
그가 새 영화 ‘열한번째 엄마’를 선보인다. 죽음을 앞둔 ‘막장 인생’ 여자가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소년의 엄마가 돼준다는 얘기다. 평소의 섹시 룩을 벗어 던진 그는 거칠게 자른 커트머리에 무릎이 튀어나온 추리닝바지, 목이 늘어난 셔츠를 입고 추레하게 늘어진다.
22일 삼청동에서 만난 그는 평소의 폭발적인 자신감도 걷어냈다. 마음의 지옥을 겪으며 한때 연기를 그만두려 자책했던, 깊은 속내를 드러냈다. “나는 이제 비로소 제대로 된 배우로 출발한다. 전 국민이 내가 어떤 길을 걸으며 자라왔는지 다 안다. 지금 나를 너무 칭찬하지 말아달라.” 화려한 베일을 걷어 올린 그의 맨 얼굴에 진심이 느껴졌다.
“처음 시나리오 읽고 밤새 울었다. 원래 시나리오는 영화 완성본보다 더 세고 충격적인데, 결손가정 가정폭력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유사한 TV 다큐를 보거나 인물을 취재하는 대신, 나를 최대한 정서적으로 피폐하게 만들려 애썼다. 황폐한 내게서 나오는 신경질, 귀찮고 짜증 어린 반응들을 그대로 살리려 한 거다. 실제 생활에서도 얼마나 예민해졌는지 숨이 턱 멈추는 경험도 몇 번 했다.”
“극중 추레한 의상은 대부분 나랑 내 친구 옷이다. 대본에는 긴 치마에 얌전한 단발로 돼있는데 그건 아직도 이 여자가 여성성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잖나. 오해를 살까 봐 의상에 대해서는 의견을 잘 안내는 편인데, 여기서만큼은 내 뜻을 폈다.”
“봉천동에서 영화를 찍었는데 다른 동네와 달리 주민들이 전혀 구경 나오지 않았다. 뭔가 자신들의 생활이 노출되는 게 부끄럽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내가 과연 이들의 처절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까? 사실 진짜 힘든 사람들은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 같은 배우는 이런 힘듦이 일시적이라는 걸 아니까 순간적으로 몰입하고 일로서 즐길 수 있는 거지.”
“캐릭터를 준비하지만 촬영 전에는 다 버린다. 정보나 선입견이 본의 아닌 계획이 돼 연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애초 분석한 것과 다른 연기가 튀어나오면 배우가 아주 당황하기도 하고. 현장에는 무조건 다 비우고 나가는 게 철칙이다.”
# 김혜수와 엄마=“일반적인 엄마 얘기라기보다 소외 당하고 불쌍한 사람들 얘기로 받아들였다. 엄마는, 나이 들어갈수록 짠해지는 존재다. 나는 어려서부터 일 때문에 집을 떠나 있어 늘 엄마가 그리웠다. 힘들면 모든 걸 엄마한테 얘기했는데 언제부턴가 진짜 힘들면 엄마한테 얘기 못한다. 그게 나이 들어가는 증거 같다. 독신주의는 아니지만 결혼보다 엄마가 되는데 더 관심이 많다. 20대 부터 엄마가 되고 싶었다. 공개 입양을 알아본 적도 있는데 사무실에서 ‘진짜 김혜수씨 냐’고 놀라더라.”
#제2의 전성기=배우로서 그의 여정은 그렇게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정말 연기 잘하는 배우들을 보면 경외감을 느낀다. 재능의 한계를 느껴 배우의 길을 그만두려 했다”며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죽도록 준비하고, 이성적으로 납득하고, 감정적으로 정확히 알고, 진정성을 담아 연기했는데 그게 모니터에서 안 느껴질 때가 있다. 순간 현장이 지옥이 된다. ‘도대체 뭐가 잘못이지?’ 불안과 의심에 딱 죽고 싶은 기분이다. 그런데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으니 배우란 참 외롭고 무서운 길이다. 죽을 동, 살 동 간신히 제 한계를 깨도 성취감보다 슬프고 분한 감정이 크니, 묘하다.”
“‘열한번째 엄마’ 촬영 중 쓴 다이어리를 보면 마치 자살 직전 사람 같다. 지금 촬영중인 ‘모던 보이’도 마찬가지다. 연기할 땐 그렇게 늘 지옥을 겪는다. 소수의 위대한 배우들은 다 그런 지옥을 겪어낸 분들이고.”
“‘얼굴없는 미녀’(2004 )때 처음으로 스크린 속 내 모습이 보기 싫게 느껴졌다. 그렇게 지수(극중 이름)를 사랑했고 치열하게 했는데 안 되는구나, 나는 배우 자격 없고 재능 없구나, 이제 관둬야 하는구나…, 너무 슬퍼서 엉엉 울었다. 그간의 인생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러다가 만난 영화가 ‘타짜’다. 나는 진심으로, 이제야 배우로서 제대로 출발한다고 느낀다. ”
“좋은 배우란 결국 좋은 사람이다. 좋은 인간이 좋은 정치인이 되고 좋은 뭐가 되지, 나쁜 놈이 어쩌다 뭐가 되지는 않지 않나. 나는 어려서 연예인이 됐고 연예인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느라 개인으로는 아주 단조로운 삶을 살았다. 내가 인생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다 영화를 통해 배운 것이고, 영화 하며 만난 사람들을 통해 철도 들었다. 배우로서 내 행복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인간으로서, 연기자로서 성숙해가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나를 기다려주고, 다시 기회를 준 관객들께 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글=양성희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