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회사 살리기 위해 우린 먼저 떠납니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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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명예롭게 정년퇴직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회사가 어려워 후배들에게 무거운 짐을 두고 먼저 떠납니다. 이곳을 꼭 지켜 주세요.”-김기선(54) 전 디자인센터 차장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우리의 ‘대우일렉’이 영원하도록 노력해 주세요.”- 최병수(47) 전 구미 디스플레이생산팀 차장

 대우일렉트로닉스의 사내 게시판엔 최근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떠나는 직원들이 남겨 놓은 이 같은 내용의 게시물로 넘친다. 대우일렉은 올 5월 인도 비디오콘 컨소시엄과의 매각 협상이 결렬되자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경영진은 현재의 직원 규모로는 인건비 부담이 많아 새 주인을 찾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8월부터 두 달 동안 회사를 떠난 직원은 1500명. 전 직원 4000명의 40%에 가깝다. 그러나 떠나는 직원들은 회사를 원망하지 않았다. 명예퇴직금은 1인당 2000만원도 안 되는 수준. 그럼에도 이들은 18년의 무분규 전통을 이어 회사를 걱정하며 ‘소리 없이’ 떠났다.

 

◆끝나지 않은 아픔=이달 23일 찾았던 광주광역시 하남공단의 백색가전 공장은 구조조정의 태풍이 불고 지나간 곳답지 않게 쉴 새 없이 돌아갔다. 근로자들은 독일의 보슈와 지멘스, 미국의 GE 등에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주문받은 양문형 냉장고를 만들고 있었다. 냉장고 뒤편에는 ‘메이드 바이 대우’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이 공장에서 만든 냉장고 중 이렇게 남의 이름을 달고 수출되는 것은 60%가 넘는다. 주문이 밀려 주말도 없고, 밤도 없다고 했다. 이성길 공장장은 “이달 주문받은 물량의 20%는 다음 달로 넘겨야 했다”며 “크리스마스 연휴에도 일을 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일감이 넘치고 공장은 쉼 없이 돌지만 대우일렉의 근로자들에게선 신명보다 비장함이 느껴졌다. “너무 많은 동료가 떠났고, 우린 이들을 대신해 이를 악물고 공장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정범 대우일렉트로닉스 관리팀장의 말이다.

 ◆그래도 ‘희망’을 믿는다=대우일렉은 매각 협상이 결렬된 뒤 자동차용 오디오 등을 생산하는 IS사업본부 등을 매각했다. 인력 감축에 맞춰 생산 공정도 개선했다. 투자할 돈이 없어 냉장고 라인의 핵심 공정인 우레탄 폼 압착 설비를 증설하지 못했다. 회사는 이 기계를 24시간 돌리는 대신 직원들을 낮에만 출근토록 했다. 설비를 충분히 활용하고 집중 근무제를 도입해 인건비를 줄인 것이다. 이런 노력으로 10월에는 소폭이나마 흑자로 돌아섰다. 내년에는 아랍에미리트의 수도인 아부다비에 연간 350만 대 규모의 가전공장을 지어 주는 아부다비 프로젝트가 완성된다. 이 공장이 가동되면 대우는 매출액의 2%를 로열티로 받고 연간 1000만 달러어치의 부품을 수출할 수 있다. 이승창 사장은 29일 보슈와 공동 생산기지 구축을 포함한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독일로 떠난다. 새 주인을 찾는 작업도 재개됐다. 채권단은 22일 매각 공고를 내고, 내년 1월 우선협상 대상자를 선정할 방침이다.

광주=김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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