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실명제 시행령 개정의 배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정부가 결국 금융실명제의 금융거래 비밀보호조항들을 대폭 완화.수정하기로 함으로써 상당한 파장이 예상되고 있다.
공직자윤리위원회나 감사원.검찰 등은 사정.수사활동이 훨씬 쉬워지게 된 반면 예금자의 비밀을 엄격히 보호하겠다는 실명제 긴급명령의 취지는 상당히 후퇴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번 정부의 실명제 수정에 따라 사정.수사기관들은 사실상 「실명제 이전 수준」에 가까운 조사.수사권을 확보하게 됐다.
예컨대 한 은행과 거래하고 있는 비리공직자의 계좌를 추적하려면 현재는 지점 단위로 하나하나의 계좌를 일일이 뒤져야만 하게돼 있으나 앞으로는 그 은행 본점의 전산망을 두드려 모든 지점,모든 계좌의 거래 내역을 바로 뽑아 볼 수가 있다.이같은 비밀보호의 후퇴가 당장 금융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아직까지 실명화되지 않은 금융자산이 이번 조치로 새삼 움직일리도 없을 것이고 또 정부의 설명대로 「일반 개인이나 기업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조치는 실명제를 실시하면서 정부가 했던 약속을 상황이 변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저런 명분을 달아 얼마든지 수정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신뢰」를 기본으로 하는 실명제에 흠을 내고 말았다.
이번 조치는 인천 북구청의 세무비리사건이 계기가 됐지만 앞으로도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런 식으로 비밀보호라는 대들보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감출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정부 스스로도 실명제의 기본이 흔들리지 않느냐는 소리도듣지 않아야겠고 그러면서도 비밀보호 조항에 이것 저것 손을 대자니 결과적으로 각종 법규간의 상충을 빚고 말았다.
긴급명령은「다른 법에 우선해 적용한다」는 자체 조항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조치로 공직자윤리법이나 감사원법 등이 개정된 뒤 「신법우선의 원칙」에 의거,긴급명령이 사실상 배제되게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분개정 식으로 계속 대응할 것이 아니라 「공익목적의감시」와 「예금자 비밀보호」라는 서로 상충되는 정책목표에 대해종합적인 정리를 한 뒤 국민들의 이해와 협조를 구해야 국민들도안심할 수 있을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閔 丙寬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