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FTA시대 외톨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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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어제 아침 신문 1면에 '멕시코로 타이어를 싣고 간 선박이 통관도 못하고 회항 중'이란 기사가 나간 뒤 여러 통의 전화를 받았다. 어떤 독자는 "타이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멕시코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지 못한 바람에 관세율이 갑자기 높아져 수출을 못했다면 책임이 정부에 있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민간 거래에서 발생한 피해까지 책임질 수야 없겠으나, 정부가 반성해야 할 일임은 분명한 것 같다.

한국산 타이어 수출이 묶인 틈을 타 일부 유럽 업체는 멕시코 현지 판매 가격을 슬그머니 올리는 등 반대급부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정부의 직무유기 때문에 피해는 고스란히 기업들이 보는 상황이다.

요즘 '한.칠레 FTA' 비준안 처리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국회도 이젠 더 미루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총선을 앞두고 유권자 눈치를 보느라 국익을 저버렸다"는 비난이 쏟아지는 데다 "한국은 믿지 못할 나라"라는 등 국제 여론도 좋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비준안이 통과되는 것으로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칠레말고도 FTA를 맺을 나라가 세상에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칠레가 첫 FTA 상대로 꼽혔던 이유 중 하나는 '충격완화'였다. 칠레는 우리와 가장 먼 나라 중 하나다. 낮과 밤이 다르고 계절도 반대다. 운송도 불리해 교역에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 따라서 FTA를 맺어 관세 장벽을 없애도 충격이 상대적으로 작을 것이라는 고려가 깔려 있었다.

그런데도 5년이 걸렸다. 1998년 말 정부가 한.칠레 FTA 추진을 결정하고, 99년 시작한 협상은 2002년 10월에야 타결됐다. 정부는 지난해 7월 국회에 비준 동의안을 제출했으나 보류 중이다. 칠레 다음으로는 일본.싱가포르.멕시코.태국.뉴질랜드 등이 거론되고 있다. 언젠가는 미국.중국과도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이런 나라들과는 교역 규모가 크고, 이해관계도 복잡해 협상 자체가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또 어떤 식으로 협상하든 국내 어느 산업인가는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만약 중국과 FTA 협상을 마쳐 값싼 공산품들이 무관세로 쏟아져 들어오면 그때는 기업들이 거세게 반발할 수도 있다.

FTA는 특히 최근 들어 급속히 활발해지는 추세다. 90년까지만 해도 전 세계적으로 FTA 체결은 31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1백여건이 추가됐다. 올해의 경우 적어도 15건이 타결되고, 신규 협상도 10건 이상 이뤄질 전망이다.

이처럼 세계는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자'며 실리를 취하는 형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런 시대적 흐름을 세계 12위 무역대국인 우리도 피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1백48개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 중 FTA를 하나도 맺지 않은 나라는 우리와 몽골뿐이다. 그런 몽골도 얼마 전 우리에게 FTA를 제의해 왔다. 국제 외톨이가 돼선 안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협상 타결로 손해를 볼 산업에 대한 대응이다. 농업이 피해를 보게 된다고 FTA 자체를 기피하는 것은 해결책이 안 된다. 분야별 손익을 넘어 국익 차원에서 결정해야 한다.

농업은 경쟁력을 높이고 체질을 바꾸는 대책을 별도로 세워야 한다. 욕을 많이 얻어먹을 수밖에 없는 궂은 일이다. 이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책임이 정부와 정치권에 있다. 직무유기가 계속되는 한 제2, 제3의 '멕시코 타이어' 같은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

민병관 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