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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집 콜라10병 마시고 金번쩍-역대아시아드 에피소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의 개막이 박두했다.
51년 뉴델리에서 첫 대회를 시작한 아시안게임은 90년 베이징(北京)대회까지 11회를 이어오면서 숱한 화제를 뿌리며 아시아인의 단결과 화합을 다져왔다.
한국은 전쟁의 참화속에서 1회 대회를 빠진뒤 2회대회에 첫선을 보여 6개종목 85명의 선수단이 참가해 종합 3위를 차지했다.총 8개의 금메달중 5개를 따낸 역도가 일등 공신.
한국은 당초 역도 7개체급중 5개체급 7명의 선수를 출전시킬예정이었으나 이란이 국내 정치 불안으로 불참하자 선수를 골고루분산시키는 작전으로 바꿨다.
그러나 김성집(金晟集)씨는 미들급에서 라이트헤비급으로 체급을바꾸고서도 아무리 먹어도 체중을 늘일수 없어 애를 먹었다.열대지방인 마닐라에서 한여름인 5월에 몸무게를 늘이는 것은 줄이는것 보다 더 힘들수 밖에 없었다.하는수 없이 경기당일 콜라 10병을 마시고 가볍게(?)계체량을 통과,금메달을 거뜬히 들어올렸다. 한편 이 대회에서 최윤칠(崔崙七)은 한국선수로서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의 영광을 안았다.崔는 육상 남자 1천5백m에서강력한 우승후보이던 일본의 무로야를 1초80 앞서며 우승한뒤 기자회견에서 『일본 선수만은 꼭 이겨달라고 당부한 이승 만(李承晩)대통령과의 약속을 지켜서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62년 자카르타대회는 육군중사 남상완(南相完)을 일약 스타로만들었다.
대회 1개월전에 대표로 선발된 南은 고작 1주일 연습한뒤 출전.그나마 현지에 가서야 총의 무게가 8㎏이내여야 한다는 규정을 알고 8.5㎏짜리 총에서 부랴부랴 개머리판을 떼어내고 금메달을 명중시키는 군인정신을 과시했다.
66년 방콕대회에서는 농구장에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한국-태국의 남자 농구 준결승 경기종료 4분여를 남기고 김철갑(金鐵甲)이 태국선수의 팔꿈치 공격으로 쓰러지면서 시작된 난투극은 관중과 경찰까지 합세,험악한 분위기로 이어졌다.김철갑은이날 앞니 두개가 부러지고 말았다.
한편 탁구 김충용(金忠勇)의 남자단식 금메달은 전혀 예상밖이어서 선수단본부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거짓말마라』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를 남겼다.70년 방콕대회에서는 화제가 끊이질 않았다.그중 압권은 축구-농구선수의 술대결.
축구.농구의 동반우승으로 기분이 좋아진 장덕진(張德鎭)단장이술겨루기를 제안,5명의 대표가 나섰으나 농구가 압승한 것.
당시 축구협회장이던 張단장은 맥주잔에 양주를 부어주며 축구팀이 이겨주길 바랐으나 결과는 엉뚱하게 나고 축구선수들은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북한이 첫 출전한 74년 테헤란대회에서는 남북대결이 도를 지나쳐 스포츠맨십에 흠집을 남겼다.
북한의 전력이 예상외로 강하자 당시 김택수(金澤洙)체육회장은결승에서 남북축구가 맞붙는 것을 피하기 위해 준결승에서 고의로패배하도록 지시,한국은 쿠웨이트에 5-0으로 참패한 것이다.
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금메달 28개로 17개의 북한을 크게 제치고 3위를 차지했는데 「김치작전」의 승리였다.
뉴델리가 교민이 적은데다 배추가 없는 것을 미리 간파한 당시김종렬(金鍾烈)단장은 인도 대사관과 미리 연락,대회 반년전 배추씨를 보내 뉴델리 근교 밭에 씨를 뿌려 배추를 수확해 김치를준비했다.
뿐만아니라 대사관 식당에 곰국을 항시 끓여놓아 언제든지 한식을 먹도록 배려해 한국선수들은 용기백배,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86년 서울대회에서는 육상 임춘애(林春愛)의 「라면먹고 금메달 땄어요」라는 말이 대유행이었다.슈퍼마켓마다 라면이 동나는 소동을 빚었는데 언론의 과장된 보도가 한몫한 것은 물론이다. 90년 베이징대회는 김원탁(金元卓)이 장염의 고통을 이겨내며 불굴의 투지를 발휘,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金은 32㎞지점에서 지병인 장염이 재발,극심한 통증으로 기권위기를 맞았으나 오히려 투혼으로 극복하며 36㎞부터 단독선두로나선끝에 일본의 시미즈를 제치고 극적인 우승을 엮어냈다.
[히로시마=金相于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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