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보육정책, 국가와 민간이 할 일 가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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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초기 “낳기만 하면 아이는 나라가 키우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4년 임기가 다 가도록 이 땅에서 애 낳고 키우기는 여전히 힘겹고 고통스럽다. 젊은 부부들은 임신과 양육을 축복으로 여기기는커녕 부모의 업보라고 자조하고 있다. 이 정부는 올 한 해 보육예산이 1조원을 넘어섰다고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늘어난 보육예산을 체감하는 국민은 별로 없다. 보육 서비스 개선에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보육정책의 틀이 잘못 짜여진 탓이다. 부모의 손에 지원금을 쥐여주면 될 것을 시설에 돈을 주니 시설 간 경쟁과 서비스 향상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관리·감독 체제가 허술해 정부 지원이 질적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시설 운영자의 주머니만 채운다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지원금이 쏟아지는 영아반은 우후죽순 늘어나지만 대기자가 줄을 잇는 국공립 어린이집의 증설은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보육시설의 환영을 받는 것도 아니다. 쥐꼬리만큼 지원하고 각종 규제를 가한다며 보육단체들은 툭하면 집회와 시위를 벌이고 있다. 교사 처우는 여전히 열악해 하루 10~12시간씩 일하고 월 100만원 미만의 월급을 받고 있다.

애당초 정부가 아이를 전적으로 키워주겠다는 말 자체가 국민을 속이는 일이다. 보육의 공공성을 부인하자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월급의 절반 정도를 세금으로 떼어가는 북유럽식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다음에야 나라가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국민을 현혹하는 선심성 보육정책을 앞다퉈 내놓기로는 차기 여야 대권 후보 간에 차별성이 없다. 이명박 후보는 전체 만 5세 미만 아동의 무상 보육을 공언했다. 정동영 후보는 신혼·출산 부부에게 2억원까지 대출하고 아이가 만 2세가 될 때까지 월 10만원의 양육보조금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각 후보 진영은 연간 2조~3조원이 든다고 발표했지만 재원 마련의 책임성은 희박하다.

차기 정부는 보육의 패러다임을 새로 짜야 한다. 이는 예산을 늘리는 일보다도 시급한 과제다. 우선은 정부가 책임질 부분과 시장원리에 맡길 분야를 나누는 것이다. 농어촌과 장애아·저소득층 아동에 대해서는 국·공립 보육시설을 통해 충분한 보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현재 5% 정도인 국·공립 보육시설을 최소한 전체의 30%까지 끌어올려야 가능하다. 아울러 맞벌이 가정의 아동을 우선 지원하는 등 정책의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한정된 재원에서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보육교사의 열악한 처우는 보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민간 부문에서는 보육료 자율화의 도입을 심각히 고려해야 한다. 전체 시설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민간 보육시설에 시장원리를 도입하지 않고는 수준 높은 서비스를 기대하는 부모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 보육료 인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미 많은 부모들은 예·체능 교육에 월 수십만원씩 들이고 있다.

보육정책은 선심 쓰듯 발표한 뒤 아니면 말고 하는 식으로 이뤄져선 안 된다.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의 미래이자 장차 국가를 이끌고 갈 동력인 아이들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