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9. 반대와 천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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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953년 부산 천막교실에서 공부하던 경기고 2학년 3반 때 필자(맨 뒷줄의 맨 왼쪽).

“가야금을 배우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너는 지금 학생이니 대학이라도 나온 다음에 가야금을 해야 하지 않겠니. 학교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말이다.” 1951년 호기심에 들른 부산의 김동민 고전무용연구소에서 처음 들었던 가야금 소리에 반해 “가야금을 배워야겠다”고 선언하자 부모님이 타이른 말씀이다.

고전무용연구소에서 방 한 칸을 빌려 살던 김철옥 선생의 가야금 소리에 나와 함께 마음이 동했던 친구 홍성화는 부모의 반대로 결국 가야금을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세상이 무너져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생각난 사람이 아인슈타인이다. “그 위대한 과학자도 바이올린 연주 실력이 프로급이었는데 그 분이 물리학을 하는 데 지장이 있었습니까? 저도 오히려 학교 공부를 아인슈타인처럼 잘 하게 될 겁니다.” 우리 가족 모두 알 만한 사람을 예로 들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후회만 하지 말아라.” 문제는 수강료였다. 김철옥 선생에게 매일 가야금을 배우는 데 드는 비용은 지금 돈으로 한 달 20만원쯤 됐다. 부모님은 결국 이만한 돈을 매달 주시고 나중에는 악기까지 구해주셨다.

이렇게 해서 매일 하굣길에 가야금을 배우고 귀가하는 일과가 시작됐다. 하지만 가야금을 천시하는 풍조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지금은 음악을 업으로 삼아 사는 사람들이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가야금을 갖고 다닐 때 등 뒤에서 놀리는 듯한 여학생들의 웃음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나를 어릿광대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또 “왜 사내가 궁벽스럽게 가야금을 하려고 하느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 “굳이 음악을 하려면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말에 귀 기울였다면 가야금을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의기소침하기는커녕 더 좋은 선생님을 찾아 나섰다. 내게 처음으로 가야금을 소개했던 친구 홍성화는 “내가 들었는데 국립국악원이라는 곳이 있다더라. 이왕 배우려면 권위 있는 곳을 찾아야 않겠느냐”고 권했다. 가야금을 배우러 가자고 했던 말처럼 이 또한 귀에 솔깃했다.

그는 나를 데리고 국립국악원을 찾아갔다. 부산 용두산 꼭대기에 자리잡은 피란 국악원이었다. 일본식 목조 건물의 1층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층은 국악원에서 썼다. 일제 시대에는 일본 왕족과 그 시조를 모시는 신궁의 사무실로 썼던 건물이다. 국악원에 들어가려면 1층을 통해 올라가는 게 아니라 산비탈 위 바위와 연결된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이 아슬아슬한 관문을 거쳐 찾아간 곳에서 나는 김영윤(1911~72) 선생에게 처음으로 정악(궁중에서 연주되던 음악)을 배웠다. 본격적인 가야금 공부가 시작된 것이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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