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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력근무제 도입 서두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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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며칠 전 영국 정부가 18세 미만 자녀를 둔 남녀 근로자에게 일과 가족생활의 양립을 위한 탄력근무를 국가적 차원에서 확대해 가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맞벌이가 보편화하면서 일과 가정을 균형 있게 추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국가가 주도적으로 나서겠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맞벌이가 급증하는 추세다. 각종 조사에서 맞벌이 희망자가 70%를 넘으며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그 비율은 높아진다. 필자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대부분 맞벌이를 희망한다. 흥미로운 것은 남학생들의 선호도가 더 높다는 사실이다. 혼자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의 무거움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사회에서 맞벌이에 대한 인식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수입이 늘어 경제적으로 여유롭긴 하지만, 동시에 자녀 양육에서는 뭔가 부족한 양식이라는 것이다. 전자는 선망의 기호이지만 후자는 결핍의 기호일 수 있다. 왜 그럴까?

맞벌이 가족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시간일 것이다. 부부 모두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과 자신을 위한 시간이 충분치 않다. 특히 어린 자녀를 둔 가족의 경우 시간 부족은 일상적이어서 ‘시간 갈등’ ‘시간 압박’ ‘과로(過勞)의 문화’와 같은 말들이 쏟아지고 있다.

최근 필자가 유럽연합(EU) 25개 국가와 서울을 비교 연구한 결과, 서울 시민은 EU 국가에 비해 2배 이상의 시간 부족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족생활 시간에서 2003년 EU 25개국 남녀 취업자 중 시간 부족을 느낀다는 사람이 전체 응답자의 25%인 데 비해 서울 시민의 경우 68.8%에 달했다. 이러한 응답 결과를 낳은 주된 원인 중 하나는 노동시간의 길이일 것이다. 2006년 EU 평균 주당 노동시간 38.7시간에 비해 한국의 노동시간은 10시간 이상 길다.

이처럼 노동시간이 길면 가족과 자신을 돌볼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적 총 노동시간을 재조직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최선의 방법이 노동시간 단축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절대적인 노동시간을 줄여가는 것과 함께 노동시간을 선택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가족을 돌보는 데 필요한 시간을 고려하면서 근무 시간을 조정해 가는 것은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근로자 가족을 만성적인 시간 부족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윈-윈(win-win) 전략이다. 이 정책이 ‘탄력근무제도(flexible working system)’다. 이는 일정 정산 기간의 총 근로시간을 결정한 다음, 근로자가 근로시간의 시작과 종료를 일정한 시간대에서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는 근무제도다. 60년대 말 독일에서 시작돼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실시되고 있으며 영국·스웨덴·네덜란드에서는 30% 이상의 근로자가 이 제도하에서 일하고 있다.

영국은 2003년부터 고용관계법을 개정해 탄력근무제를 더욱 확대해 오고 있다. 연간 근로시간 계약제는 주 단위가 아니라 1년 단위로 근로시간을 계약하고, 이에 근거해 근로시간을 결정하는 제도다. 압축 근로시간제는 통상보다 짧은 기간 내에서 총 근로시간을 계약하는 제도다. 예컨대 주 4일 동안 통상 주 5일 동안의 일을 하는 것이다. ^두 명의 근로자가 하나의 풀 타임 직무를 나눠 하는 일자리 나누기 ^자녀의 방학 중 무급의 휴가를 사용할 수 있는 학기간 근로 ^6개월 정도의 연속적인 일정기간 동안은 근로시간을 단축하고 그 후는 통상의 시간으로 돌아가서 일하는 기간한정 근로시간 단축제도 등 탄력근무제의 프로그램은 다양하다.

이 제도는 결근율과 이직률을 낮추고 근로자의 직무만족도를 높여 직장에 대한 헌신성과 근무성과를 향상시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중 가장 긴 노동시간을 가진 한국은 그 어떤 사회보다도 이 제도의 확대가 절실히 필요하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사회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