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열광적인 모습을 지켜보는 제 표정이 좀 시큰둥했나 봅니다. 누군가 묻더군요. “그럼, 너는 배우를 보고 가슴이 두근거린 게 언제가 마지막인데”하면서요. 곰곰이 돌아보니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온 소심한 꽃미남 마법사 하울이 가장 최근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울은 만화적인 기법으로 생략되고, 추상화된 캐릭터입니다. 흔히 꽃미남을 설명할 때 ‘순정만화에서 걸어나온 듯하다’는 말을 하는데, 하울은 순정만화 그 자체지요.
실사영화의 꽃미남에 둔감해진 변명을 하자면 직업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스타가 아니라 배우로 인정받고 싶어요” 하는 배우들의 말을 자주 들은 탓도 있고, 여러 출연작에서 잘한 것 못한 것 고루 보면서 ‘배우가 빛나는 건 역시 작품 때문’이라는 생각을 거듭한 탓도 있겠지요.
앞서 열거한 꽃미남 배우들을 저도 좋아하기는 합니다만, 그 이유가 여느 팬들에 비하면 좀 불순합니다. 예컨대 강동원이라는 배우가 좋아진 것은 꽃미남과 관계없는 농촌 청년(‘그녀를 믿지 마세요’)을 그럴듯하게 연기한 모습 때문이었지요. 겨우 30분짜리 인터뷰로 만난 기무라 다쿠야가 마음에 들었던 것도 자신이 유아독존의 스타가 아니라 일본식 철저한 매니지먼트 시스템 안에 놓인 직업인임을 말끝마다 드러내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제 태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가 왕이 되건, 광대가 되건, 옷을 벗건, 얼굴을 고치건 “그래도 좋아”라고 말하는 팬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가끔은 솔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메종 드 히미코’에서 오다기리 조가 꽃미남인 것을 확인하고 ‘유레루’를 보러 갔습니다만, 나와서는 그의 못생긴 형 역할로 나온 배우의 연기를 칭찬했지요.
변명과 고백을 좀 더 하자면, 꽃미남의 ‘꽃미모’에 압도당하면 인터뷰가 힘들어집니다. 마치 꽃을 향해 ‘너는 왜 예쁜 지 네 입으로 설명해 봐’라고 하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하거든요.
연애시로 즐겨 오용되는 김춘수의 시 ‘꽃’에 담긴 존재론은 이런 대목에서도 유용할 듯합니다. 어느 스타의 열혈팬이 되는 순간은 그 팬에게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와 비슷한 거죠. 그러고 보니 기자의 역할이 있군요. ‘꽃미남’이라는 일반화된 이름 대신 그 꽃 하나하나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봐야겠습니다. ‘해바라기 같은 꽃미남’이든 ‘붉은 장미를 닮은 꽃미남’이든 말이죠.
이후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