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100년] 下. 고려대 사학과 조명철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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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백년 전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일본 해군이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괴멸시킴으로써 1년3개월 만에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의 결과 우리 민족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치욕의 길을 가야 했다.

당시 조선인은 일본에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조선이 참전이야 못했지만 일본군이 만주로 들어가도록 길을 열어주고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했었다. 그런데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게 됐으니 분통을 터뜨리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고 러.일전쟁의 원인과 목적이 한반도였다는 사실을 조선이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미 일본은 10년 전인 1894년에도 한반도를 장악하기 위해 청.일전쟁을 벌이지 않았는가. 일본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침략의 조짐을 보여 왔는데도 권력 투쟁에만 몰두한 조상들이 어리석게 보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당시 일본의 국내 사정은 혼란스러웠다. 서양을 모방해 헌법.정당을 만들고 국회도 열었지만 처음 해보는 민주정치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국회의원 매수와 철새 정치인의 이합집산, 정경유착과 대형 부정부패사건, 정부의 야당탄압과 야당의 발목잡기 등 미숙한 민주정치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는 거의 다 표출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러시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당시 일본이 매년 쏟아부은 군사비는 국가예산의 40%를 넘나들었다. 이러한 경이적인 수치는 정치권의 합의와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국익에 관한 한 일본은 놀라울 정도로 단합된 모습을 보여줬다.

만약 조선이 일본의 무력 앞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자 했다면 적어도 일본이 해온 것 이상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군사력 강화에 힘을 기울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그러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운명은 러.일전쟁의 승리자에 의해 결정됐다.

지금도 한반도가 동아시아의 핵심적인 문제로 다뤄지고 있는 지정학적 중요성은 1백년 전과 동일하다. 한반도 문제가 주변 강대국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상황도 비슷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주변의 강대국 중 누구도 조선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만큼 강해지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판이 짜여지고 있지만 우리의 역량은 정파 간의 싸움으로 사분오열돼 총체적으로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나라가 망해도 소모적 정쟁을 자제하지 못했던 1백년 전의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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