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EYE] 달러화, 급락이냐 점진 하락이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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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 20면

미국 달러화는 과연 어떤 속도로 어디까지 떨어질까. 달러화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고, 그 하락이 시작됐다는 데는 어떤 경제 전문가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로드리고 데 라토 총재가 이례적으로 달러화 급락 가능성을 경고했고, 미국 정부 또한 달러 하락이 무역수지 개선에 도움이 된다며 달러 약세를 묵인하는 자세다. 급락이냐, 점진적 하락이냐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을 뿐이다.

달러화는 미국의 엄청난 무역적자에도 불구하고 강세를 유지해 왔다. 강한 달러가 미국의 국익이라고 미국의 위정자들이 우길 정도였다. 막대한 무역적자에도 달러가 강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가 글로벌 저축 과잉이다. 미국은 세계적으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투자처다. 또 미국 투자자들은 외국인들이 미국 내 투자에서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해외에서 벌어들인다. 투자자산 규모는 외국인의 것이 배를 넘지만 투자수익률은 미국이 월등히 높다. 말하자면 투자소득수지 흑자가 그 두 번째 배경이다.

셋째는 소위 ‘브레튼 우즈 2’ 체제다. 각국의 중앙은행들, 특히 아시아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달러와의 환율을 거의 고정시키며 열심히 달러자산을 사들여 왔다. 미국의 해외자산이 통계상의 숫자보다는 훨씬 많다는 것이 넷째다. 미국 굴지의 다국적 기업들이 가진 전문성이나 명성, 브랜드 가치 등 숨겨진 엄청난 자산들이 해외자산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들 전제가 하나 둘씩 흔들리고 있다. 글로벌 저축 과잉은 산유국과 신흥수출대국들에 편중돼 있고 이들은 다투어 막대한 국부펀드를 조성하며 국가자본주의적 ‘큰손’으로 부상하고 있다. 외국인의 미국 내 투자자산 수익률이 낮은 것은 외화준비자산으로, 또는 환율 안정을 위해 미국 재무부 채권이나 저위험·저수익 달러자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러가치 하락의 근본 원인으로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를 매번 거론하지만 2004년 이후 원유 도입을 제외한 비원유 부문의 무역적자는 거의 제자리걸음이다.

달러 강세를 더 이상 받치지 못하는 결정적 요인은 미국이 투자처로서 매력을 잃어가는 데 있다. 그 핵심은 기술혁신과 생산성이다. 미국 경제의 생산성 증가가 둔화되는 한편 미국 기업의 기술과 관행을 습득한 해외 기업들의 생산성은 도리어 높아지는 경향이다. 미국이 약한 달러로 적자를 축소하고 세계경제의 일원으로 주저앉을 경우 투자처로서 매력은 급락할 수밖에 없다. 글로벌 성장엔진으로서, 투자처로서, 또 대외준비자산으로서 미국과 미국 달러화에 대한 믿음이 한꺼번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외국 투자자들의 미국 자산에 대한 투자는 이제 목에 찼고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신용경색이 심했던 지난 8월 1630억 달러가 빠져나갈 정도로 달러자산에 대한 신뢰감은 떨어져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미국 경제가 침체로 빠져들 경우 달러가치는 최소한 35% 이상 급락할 것이며, 이는 주요국 경제성장에 일파만파를 불러올 것으로 내다본다. 영국 파운드는 과대평가돼 있고 중국의 위안과 일본 엔은 너무 저평가돼 있다. 유로 경제가 유일한 안전판이지만 유로당 1.6 내지 1.7달러가 되면 이 역시 파국이다.

투자자들이 달러자산을 내던지지 않고 달러화가 지속가능한 수준까지 떨어지도록 인내하면서 점진적 하락으로 안착을 유도함이 최선책이다. 각국이 통화바스켓을 다양화하고 준비자산 투자도 다변화하는 등 국제적 조정 과정을 통해 보다 약한 달러(weaker dollar) 시대를 열어가는 슬기가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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