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마을] 잠꼬대와 로또 번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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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자면서 네 가지 일을 한다. 이 갈고 코 고는 것은 기본이고 잠꼬대와 몸부림도 장난이 아니다.

 신혼 때 내가 늦게 잠드는 날이면 이걸 참아내는 일이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우리 집에 잠깐 와 있던 내 여동생이 밤늦게 들어와 불을 켰다. 그때 “불 꺼”라는 남편 목소리가 들리더란다. 동생은 “네, 아직 안잤어요? 자는 줄 알았어요” 하며 얼른 불을 끄고 TV를 켰다. 이번엔 “시끄러워” 하기에 음소거 모드로 해놓고 화면을 보는데 갑자기 막 웃더라는 거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형부의 얼굴을 봤더니 글쎄 잠만 잘 자고 있더란다. 다음 날 아침, 동생이 생전 그런 모습 처음 봤다며 공포영화보다 더 무서웠다고 하니 남편은 기억이 안 난다며 딱 잡아뗐다.

 어느 날은 무슨 소리가 계속 들려서 일어나보니 어김없이 남편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8, 16, 10… 선명하게 들리는 건 숫자밖에 없었다. 순간 이건 로또 번호다, 하고 부르는 대로 휴대폰에 숫자를 마구 찍었다. 다음 날 “자다가 숫자를 부르기에 내가 다 받아 놨어. 로또 사러 갈려고…”. 그러자 남편은 “숫자? 아~ 어제 내가 꿈속에서 도면 그릴 때 사이즈 체크하면서 숫자를 부른 것 같은데…”

 결혼한 지 몇 년 지나니 이제 남편의 잠꼬대는 자장가처럼 들린다. “야! 이 자식들아 다 죽어라~~”라며 소리를 치고 조금 있다가 낄낄대면 웃는 날은 ‘아~~ 그 자식들이 다 죽었나 보다’고 생각하고, 욕을 하거나 짜증내는 날은 ‘오늘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구나’고 생각한다.

 이제 잠꼬대는 남편의 마음을 읽는 통로가 됐다. 그런데 이런, 18개월 된 아들이 아빠랑 똑 같다. 며칠 전에는 잠자며 둘이서 번갈아 키득거리는데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었다. 아이가 말문이 트이면 잠꼬대로 둘이 대화를 할지도 모르겠다. 아들아, 그런 건 닮지 않아도 된단다. 아들과 남편은 오늘도 똑같이 만세를 부르고 코를 골아대며 자고 있다.

 김보경(28·주부·경남 마산시 월영동 )

11월 9일자 주제는 황당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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