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위험성 드러난 '선제공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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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대량살상무기(WMD)였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1월 의회연설에서 "영국 정부는 최근 사담 후세인이 상당량의 우라늄을 아프리카로부터 사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대로 놔두면 이라크가 곧 핵무기를 만들고 그게 테러리스트의 손에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이 끝난 지 반년이 지나도록 대량살상무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최근 사임한 이라크 서베이 그룹(ISG) 단장인 데이비드 케이는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를 발견할 가능성이 없으며 이라크가 곧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었다는 미 정보기관의 평가를 뒷받침할 증거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미 정보당국의 평가는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후세인을 하루 빨리 끌어내리고 싶은 부시 행정부의 압력 때문에 정보가 왜곡된 것일까. 미국과 영국이 곧 초당적인 진상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므로 머지않아 최소한의 진실은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몇 가지는 분명하다. 우선 인공위성을 비롯, 고도의 첨단장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보 수집 능력은 흔히 믿어오던 것만큼 정확하지도 믿을 만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라크 전에 참여한 영국이나 스페인은 물론 전쟁을 반대한 프랑스.독일.러시아.중국도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판단에서는 미국과 큰 차이가 없었다. 결국 세계 각국 모두가 부정확한 정보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부시 대통령이 도입한 선제공격(preemptive strike)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드러났다. 미국의 안전에 위협적이라고 판단되면 그 위협이 구체화하기 전에 분쇄해버리겠다는 게 선제공격이다. 그러나 위협적인 요소를 판단하는 정확성이나 형평성에 문제가 있을 때 선제공격은 자칫 강자의 막무가내식 폭력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이라크전은 분명히 그릇된 정보와 미국의 가공할 군사력이 결합된 결과물이었다.

따라서 북한의 처지에서 미국은 무작정 행패를 부리는 무뢰한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좋든 싫든 그게 현실이라는 점을 북한은 깨달아야 한다. 물론 북한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과 다르다. 그러나 미국이 언제나 정교한 판단과 이성적인 결정으로 전쟁을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라크전은 보여주었다. 나아가 미국의 정보력과 판단력은 그들이 갖고 있는 물리적 파괴력보다 강하거나 정교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북한은 자신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미국이 속속들이 파악하고 그 의미를 이해할 것이라고 판단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최근의 국제정세는 북한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리비아가 일방적으로 핵을 포기한 데 이어 파키스탄이 우라늄 농축에 의한 핵무기 제조기술을 북한에 이전해 주었다고 폭로했다. 이란도 곧 리비아의 뒤를 이어 핵을 포기할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이 미국과 흥정을 벌일 수 있는 여지가 점점 좁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뒤늦게나마 2차 6자회담에 응한 것은 다행스럽다.

미국을 제대로 아는 북한 사람이 극소수이듯 북한을 이해하는 미국인도 거의 없다. 따라서 북한이 아무리 원한다 해도 미국과 의미있는 대화를 신속하게 전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1차 6자회담에서 북한이 미국의 진의를 한국 측 대표단에 물은 것은 바람직했다. 북.미 간 대화는 중국이 아닌 한국이 중재해야 한다.

이재학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