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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냉전 종식이 갖는 의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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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 27면

프랑스 사상가 드브레는 어떤 한 시대의 역사란 발명이나 발견뿐 아니라 그 시대가 꿈꾸었던 유토피아와 함께 묘사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현실(reality)이란 실제 발생한 것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이루고자 하는 꿈이나 희망과 함께 존재한다는 뜻이다. 냉전의 시대, 대립과 증오가 현실이었다면 많은 사람은 공존과 화해를 꿈꾸었을 것이다. 세계의 곳곳에 그 희망이 실현되었지만 지구상 유일하게 한반도만이 냉전의 짙은 그림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10월 4일 남북한 정상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한반도 평화를 향한 중요한 발걸음이다. 평화협정 체결을 향한 사전 단계로서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 선언을 두고 우리 사회엔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이번 정상회담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김정일의 술수에 놀아났다는 비판은 뒤틀린 비아냥처럼 들린다. 우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과연 북한이 이를 성실히 수행하겠느냐, 북한의 전략전술이 아직 변화의 조짐이 없는데 우리가 너무 조급한 것 아니냐고 걱정한다. 그러나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일에 우리조차 경직되어 있으면 극단적 대립 외에는 다른 방도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평화번영 선언에는 상호 존중, 긴장 완화, 교류와 협력 확대 등 8개 합의사항이 담겨 있다. 그중에서 특히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정전체제의 종식 및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에 남북한이 협력하기로 했다는 대목이다. 한국전쟁은 민족사적으로도, 세계사적으로도 비극적 사건이었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세계적 수준의 냉전체제가 고착되어 갔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소련은 세계의 곳곳에서 치열한 대립전선을 만들었고, 양국 모두 군사화된 대외정책을 추구했다. 냉전기의 세계사는 미·소 간 정치군사적 대립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냉전의 정치적 환경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인식구조에 증오와 반목의 독기를 덧씌웠다. 대결과 증오, 의심이 인간의 일상사가 되었다. 비운의 땅, 한반도에서는 더욱 치열했다. 그랬던 만큼 암울한 그림자도 더 짙게 드리웠다.

이제 세계사의 독특한 양식이었던 냉전시대가 거의 끝나려 한다. 그 희망이 냉전기 최대 희생자였던 한반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한반도에서 전쟁 종식은 비극적 세계사의 한 단락을 마감하는 의미를 지닌다.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체제를 강구해 나가는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한반도에서 대립적 균형체제를 유지시킴으로써 득실을 계산해 왔던 주변 열강들의 인식과 전략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한반도 평화의 국제정치적 조건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어려운 난관은 우리 사회 내부의 균열일 것이다. 냉전기 시대를 거치면서 하나의 신념으로 굳어져 버린 인식의 관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변화와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낙관론자들은 남북관계의 진전 속도에 지나치게 몰두해서는 안 된다. 사회의 집단적 기억이 오랜 인식적 관성을 벗어나는 일에는 고통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치적 성과의 관점만으로 접근하게 되면 사회적 균열구조만 증폭시킬 것이다. 비관론자들의 우려는 이해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신념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이념적 포박이 낳은 허상은 아닌지 성찰해 봐야 할 것이다. 아울러 두려움의 망령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희망과 용기조차 거부하지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갈등과 증오의 시대를 넘어 동북아의 새로운 평화시대를 열어가는 희망과 지혜는 한반도에서 나와야 한다. 그것이 희생을 강요받았던 우리들이 세계를 향해 들려줄 시대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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