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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떠나는 소나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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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 06면

사진 임익순 기자, 자료협조 여성중앙

소나무들이 산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나무들은 숲에서 쫓겨 산 넘고 물 건너 북으로 도망가고 있는 중이다. 자연이 스스로 변하는 천이(遷移)라는 섭생원리에 따라, 또 지구 온난화로 앞으로 50년 남짓이면 소나무는 이 땅에서 아주 사라질 판이다. 소나무들이 마을과 사람 사이를 지나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한번 후리기만 하면 그물에 멸치 떼 그득한 후리포(후포)에서 백 리를 타고 들어가는 불영계곡 끝, 낙동정맥을 타고 기골 좋은 소나무들이 올연히 서 있었다. 거기 해발 650m 산막에 솔 아래 돋아난 송이처럼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버들치, 갈겨니들 사래 치는 물길에 지난여름에 몰려와 울던 은어 떼들도 떠난 계곡에는 시린 물이 굽이치고 있었다. 남부지방산림청(청장 배영돈) 산막에서 바라보면 동해에서 불어온 바람은 삿갓봉을 다 넘지 못하고 솔가지에 머물면서 안개와 섞여 젖은 단풍을 바라보며 신음을 토했다. 사람들은 그 아래서 이야기로 화톳불을 피웠다.

백성과 함께 살아온 소나무
구름과 바람과 단풍과 이야기, 이들은 본디 다 소나무 식량들이다. 울진 소광리 금강소나무 숲은 그저 흙에 의지해 사는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소나무는 이 나라 백성들과 함께 살아왔다.

오늘은 생태일꾼 최열(환경재단 대표), ‘걸어다니는 숲’ 전영우(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초식 맹금류 눈빛을 한 화가 임옥상, 언론학자 이선경·이창현(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말심·입심 좋은 시대의 풍류문장 조용헌(원광대 동양학 대학원 교수), 여성환경운동가 최영호(한국여성환경운동본부 대표)씨 등 스물 남짓이 어우러졌다. 서른 해 전만 해도 산림에서 6할 넘게 차지하던 소나무는 이제 채 3할에 미치지 못한다. 이들이 숲을 찾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길을 나설 때부터 시작된 전영우 교수의 나직한 설명에 임옥상의 간헐적인 추임새, 조용헌의 내력풀이가 곁들여졌다.

‘소나무를 지키는 일은 숲을 지키는 일이자, 문화를 지키는 감성적 활동이기도 하다’. 소광리 숲을 도는 동안 최열 대표는 소나무를 껴안고 야단이더니 결국 ‘금강송’이라는 호를 스스로 얻었다. 그는 디자이너 이상봉을 부추겨 이참에 아예 ‘소나무 패션쇼’(11월 23일 코엑스)까지 열 계획이다. 소나무 기상을 담되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가 옷으로 옮아오는 셈이다.

모든 나무의 어른, 소나무
금강소나무는 곧추 위로 뻗은 게 한눈에 기세가 좋다. 43종에 이르는 소나무는 모양에 따라 대개 동북형·금강형·중남부평지형·위봉형·안강형으로 나눈다(1928년 일본 관학자 우에키 분류). 곧고 단단한 금강소나무는 으뜸 목재로 봉화 춘양에서 베어내고 실어냈다고 해서 춘양목, 궁궐 관을 짠다고 해서 황장목이라고들 부른다. 소광리 입구 바위에 새겨놓은 황장봉계 표석은 지금도 선명하다. 금강송은 이곳에 2267ha 크기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숲이 망가지는 걸 막기 위해 출입을 삼갔다가 지난해부터 넉 달씩 길을 터주고 있다.

소나무는 한반도 사람들과 생활과 운명을 함께해 오면서 이윽고 정서의 골간을 이루게 되었다. 소나무는 모든 나무의 어른이라는 『본초강목(本草綱目)』의 위계 어린 표현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배 주린 날, 소나무 속살 송기는 밥이었다. 송기 먹은 목으로 노래하면 절로 서러워서 꺼이꺼이 숨이 막혔다. 추석날은 송편 시루에서 향기로 피어올랐다. 우리면 차, 거르면 술이었다. 솔씨는 물론 송홧가루도 떡보다는 차라리 약이었다. 귀한 건 다 약인 터다. 뿌리는 죽은 뒤 다시 살아 복령(茯笭)이라 애초부터 약이었다. 솔잎 입에 씹어 물면 고개 하나쯤은 지치지 않고 달려 넘을 수도 있다.

송진 굳어 한 오백 년이면 호박, 베어 쓰니 목재, 막걸리 한 사발로 섬기니 영검하고, 고이면 베개요, 오르면 망루, 칼잡이에 박히면 날랜 검객이었다. 환쟁이 손에서는 송연묵이 되어 새로 소나무로 살아 나왔다. 묵은 당나라 사람들도 얻어 갔다. 가장 나중에 죽은 소나무들은 죽은 사람과 만나 함께 관이 되어 흙으로 돌아갔다.

소나무는 이처럼 한국인과 긴밀하게 살아오면서 이내 미의식으로 스며들어 기상과 멋을 품기에 이르렀다. 정작 목재로도 쓰기 나쁘고 못생겼다 할 구불거리는 모양새를 용틀임한다거나, 애써 구부린 가지로 분재를 만드는 까닭에 다 내력이 있다. 소나무 줄기가 구불거리는 건 흙 아래 바로 바위를 낀 까닭이다.

조상들은 소나무의 굴곡을 통해 삶의 신산스러운 굴절을 깨쳤고 노래했다. 단지 생김새가 아니라 관류하며 꿈틀거리는 생명력 넘치는 흐름에서 결코 그칠 수 없는 삶과 함께 내일을 보았던 거다.
지조와 기상과 생기, 풍류는 그 내면의 이름들이다. 추사의 ‘세한도’, 남농의 ‘노송도’, 한바람 임옥상의 ‘소나무’도 다 그 아들들이다.

더워진 지구가 몰아내는 소나무
지금 산에 남은 소나무들은 그 옛이야기를 그리며 바람 불지 않아도 스스로 울고 있다. 더운 지구는 나무마저 몰아내고 있다. 숲이 사라지면 문명도 함께 사라진다. 모두가 그걸 알면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다. 위험은 거기에 도사리고 있다.

밤이 이슥하면서 이야기는 더욱 무르익어 갔다.
관솔불 타는 코클 아래서 첫 글을 배웠다거나, 봉화에서 일제가 약탈해간 금강소나무 이야기며, 겨울이면 망태에 대나무 갈퀴를 찔러넣고 갈비를 긁으러 이 산 저 산 비탈을 타고, 굵은 소나무 파낸 배를 타고 주낙 걷는 법을 알았다고도 했다. 가난한 이는 생목으로 관을 짜는데 흙과 솔에 스민 습기가 맞아 육탈이 함께 진행된다는 말도 나올 즈음, 술이 두어 순배 돌았다.

9·11 사건은 자본과 욕망의 비곗덩어리인 월가에 새우젓을 박은 격이고, 오사마의 눈빛은 벌써 죽음을 받아들인 달관이 보인다는 식의 담론을 거쳐 소유토피아는 욕망의 공유라기보다 확산이라는 주장까지 뒤섞여 나왔다. 대선 얘기도 빠짐없이 말 안주발로 올랐다. 안면도 소나무 숲에 다다라서는 생솔로 푸르던 시인 채광석(1948~87)과 핵폐기장 사태까지 섬기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소광리 금강소나무 군락은 가던 길을 멈춘 채 쓸쓸히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독일 사람들이 너무밤나무 한 그루를 베면 벤츠 1대를 산다고 했는데, 우리도 다르지 않다. 소나무 1그루가 쏘나타 1대와 맞먹는다’.

실제로 6년 전 문화재청에서는 복원하는 경복궁 대들보로 상근리에서 한 그루에 2300만원씩 셈을 치르고 130여 그루를 사갔다. 앞으로 인위적 개입이 없다면 이런 소나무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 터이다. 후대에게 소나무는 상상목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런 점에서 소광리를 비롯한 섭생과 풍광 빼어난 숲은 지켜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이는 5000년을 한데 살아온 거룩한 자연유산을 물려주는 일이기도 하다. 정작 이 숲이 마지막 숲인 셈이다.

전영우 교수의 ‘소나무 칭송’
취기가 오르자 전영우 교수는 이름난 소나무 3대 조건으로 콘텐트, 사람들 눈에 띄어야 하고, 자태가 빼어나야 한다면서 저 골짜기와 이 능선의 솔들을 꼽기 시작했는데 숫제 주문을 외는 격이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천하의 소나무를 두루 찾아다녔다. 소나무를 볼 때는 한 방향이 아니라 서서, 앉아서, 누워서 보라고 귀띔하자 화가 임옥상이 딴죽을 걸고 나왔다. 남 먹고사는 영역까지는 넘어오지 말라는 거였다. 소나무와 넌싯넌싯 말을 주고받는 전영우는 나무무당이거나 애니미스트에 가까웠다. 죽어도 그러하거늘 어찌 산 것들에 넋이 없으랴. 전영우의 소나무를 산바람 가락으로 정리하면 대략 이러하다. 그건 길 떠나는 소나무에 대한 비감 어린 경의이자 칭송이었다.

500살은 먹었음 직한 마을 지킴이 거창 당송 아래 한바탕 놀고, 선암사 소나무는 들꽃과 어우러져야 제격, 구천동 반송은 베어보면 200수령이 안 되었을 듯한데 근동 사람들 믿음으로 더 나이를 먹어가고 있으니, 황희 정승 고택 옆 늙은 소나무는 가지가 여덟 번 꺾여 학이 앉을 법하다.

문경 사인송은 조경공사 한다고 흙을 북돋아줘 말라 죽고, 왼쪽이 상한 정이품송에서 보듯 소나무에게도 피뢰침이 필요한데 벼락에 맞아 두 그루 빼어난 소나무가 아쉽기만 하다.

괴산 상송리 솔은 구부러진 두 가지가 강한 생기를 주고, 영양 석보면 소나무에는 휘늘어진 자태를 일러 천수관음송이라고 할 만하구나.

서산 어느 동리는 소나무 밑에 마을이 내려앉았고, 소금강 들머리 곧추선 두 줄기 소나무, 장수에 가면 논개를 기린 군청 앞 의암송은 배가 불룩하게 뒤틀린 게 조선에서 가장 관능적이고, 연리지, 포천 부부송을 지나 울진 효자각 소나무, 영월 청룡포 35m 키 큰 솔에서 잠시 묵념을 올렸다가 돌아보니 의령 성황림, 똬리를 튼 이천 반룡송, 괴산 청천면 과거 길에 서 있는 소나무 밑에서는 이화령을 바라보라. 그러면 수양버들 같은 청도 소나무들까지 다 몰려나온다.

아홉 가지를 뻗은 채 개천 옆에 살고 있는 함양 구송, 600살은 너끈한데 운무 속에 몸을 뒤흔들고 있는 합천 소나무, 수영만 곰솔을 거쳐, 청도 운문사 삼짇날 막걸리 공양 받는 소나무, 예천 강천면 풍양리 토지대장을 소유한 부자 소나무에 이르러 한 대목을 축이고, 지리산 천년송 할매소나무 아래서 한세월을 보내야 하리.


서해성씨는 한국사회의 여러가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연구자이자 소설가로 '아!고구려전'의 전시 기획, 시민방송 창설 등에 힘을 보탰고 지금은 이주 노동자 가족을 위한 문화인권 프로그램 '아시아 스타트'위원장으로 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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