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낳은 역사의 현장 얄타를 가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黑海에 면한 우크라이나의 특급 휴양지 얄타.
이곳엔 한국분단의 씨를 뿌리고 전후 세계질서를 개편한 당시 세계 세 巨頭간의 얄타회담이 열렸던 리바디야 궁전이 있다.
비록 풍랑이 거칠고 파도가 매몰찬 黑海연안에 자리해 있지만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데다 대륙에선 볼 수 없는 바다와 긴 해변이 펼쳐져 있는 얄타는 러시아인에겐 빼놓을 수 없는 비境이다. 이처럼 뛰어난 風光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황제와 귀족들의 별장이 다투어 지어졌으며 안톤 체호프를 비롯한 여러 러시아문인들의 작품 배경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얄타의 여름은 아름답고 평화스럽다.
리바디야 궁전은 얄타에서도 최고 明堂인,흑해를 바라보는 모가비山 등성이에 위치하고 있다.
리바디야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지금도 세상사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분위기와 경치에 취했는지 아니면 당시 西部전선에서 대승을 거두기 시작한 蘇聯軍의 막강한 위력을 높이 평가했는지 모르지만 당시 병약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美國대통령과 그 때쯤역사의 무대에서 서서히 밀려나던 老帝國 英國의 윈 스턴 처칠수상은 이곳에서 소련의 몫을 요구하고 덤벼드는 스탈린을 달래며 동부전선을 열고 유엔을 창설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얄타회담의 주 회의장이었고 회담 당시 미국측의 숙소였던 리바디야 궁전.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이 궁전은 아름답고 화려한 외양과 달리 퍽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역사를 갖고 있다.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여름 휴양저택으로 출발,볼셰비키에 의해역사상 최초의 농노들을 위한 휴양지 호텔로 변했다가 역사적인 회담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궁전이 지금은 역사박물관으로 돼있으니 그 變轉의 모습들이 마치 세계사의 한 페이지 를 보는 것 같다. 그래서인가 얄타 시내에서 약 10㎞ 정도 떨어진 리바디야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獨逸.日本의 패망 이후 세계지도를 그려냈던 현장의 분위기를 느끼려는 독일.일본인 관광객들로부터 이제는 사라진 스탈린大元帥시절 소련의 막강했던 힘을 다시 한번 느껴보려는 러시아인 관광객까지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다양하고 숫자도 1년 에 70만명을 웃돈다고 한다.
리바디야 궁전의 안쪽 1층엔 창밖으로 花園이 보이고 저 멀리老松 사이로 산과 바다가 바라보이는 전망 좋은 아지다 리나야라는 이름의 방이 있다.
당시 루스벨트의 응접실겸 서재로 쓰였던 이 방엔 지금도 당시분위기를 전달하려는 듯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환담하는 사진과 얄타회담 합의사항을 실은 프라우다紙가 전시돼 있다.
걸음을 안쪽으로 옮겨 비빌리아르드나야라는 방에 들어서면 루스벨트.처칠.스탈린 세 거두가 45년2월에 새로운 국제기구를 창설하기로 합의하고 서명을 했던 모습이 여전히 그대로 보존돼 있다. 그러나 이곳 리바디야에서 한국의 분단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회담 기간중인 45년2월4일부터 11일까지의 모든 공식적인 대화를 기록해 둔 대화록에도 한국문제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리바디야 역사박물관 부관장이자 학술담당 책임자인 나탈리아 스테파노바여사는 당시의 상황들을 적어놓은 공식자료들을 내보이며 오히려『한국문제는 여기서는 논의되지 않았다.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만으로 판단한다면 당신이 잘못 안 것이다』고 단 정했다.
얄타회담에서 한국분단의 원인이 된 신탁통치에 관한 합의가 이뤄진 것으로 배워온 한국인의 입장에선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래서 공식자료엔 없지만 미국측 자료(보렌 의사록)나 증언에따르면 분명히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문제를 이곳에서 논의했다는 언급이 있다고 재차 얘기하자 그녀는『만약 정식 의제가 아닌 상태로 논의됐다면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비공식 회담 형식으로 환담했던 45년2월4일이나 8일중 하루일 가능성이 크며 그중에서도8일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45년2월8일의 상황을 기록한 비공식 문건들에 의하면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처칠을 배제한 채 소련군의 對日戰 참전문제와 소련에 대한 참전보상문제등을 논의했다고 돼있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결국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면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45년2월8일 이곳 리바디야의 조그만 1층 방 아지다 리나야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문제를 잠시 논의했고 결국 이날의 짧은 언급과 논의가 한국 분단의 비극을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아지다 리나야를 돌아보았다.
조그만 방 한쪽 구석에 페치카가 있고 그 옛날 서재였음을 보여주는 책상과 부속 가구들이 놓여있다.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한 느낌도 들지않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對日戰 참전 문제를 논의하면서 한국문제도 논의했고 한국민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들 마음대로 신탁통치를 결정했다고 생각하니 역사에서 소외돼온약소민족의 설움이 恨으로 응어리져 온다.
내년은 전후 세계질서를 결정지었던 얄타회담 50주년.
이때를 맞아 아직도 몇가지 풀리지 않은 비밀의 열쇠들을 제공해줄 특별 전시회와 학술대회가 이곳 리바디야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아마도 이때가 되면 한국의 신탁통치문제를 논의했던 스탈린과 루스벨트의 비공식 회담에 관한 자료도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