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대 세운 한국 조선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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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2011년 상반기에 선박을 인도받고 싶다면 도와드릴 방도가 없네요. 2012년 이후면 가능할 듯 싶은데…. 그래도 괜찮으면 견적서를 보내드리겠습니다.”

현대중공업에서 조선영업을 총괄하는 김병호 전무는 요즘 해외의 주요 선주 전화를 받으면 이렇게 응대하곤 한다. 2011년 말까지 선박 수주 물량이 꽉 찬 때문이다. 그 이전에 선박을 넘겨받길 원하는 선주가 물어오면 이듬해인 2012년까지 기다려 줄 수 없느냐고 물어보고 안 되면 정중히 거절한다. 김창수 부장은 “예전엔 생산계획을 약간 느슨하게 짜 놓고, 거절하기 힘든 주문이 오면 ‘끼워 넣기’도 했지만 요즘엔 워낙 빠듯하게 생산 일정을 짜 조선소 안에 여유 공간이 없다”고 털어놨다. 사상 최대 호황으로 국내 조선업계가 영업을 하면서도 ‘어깨’에 힘을 준다. 특히 회사 규모와 품질·납기 준수 면에서 세계 정상급인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빅3’는 앉아서 골라잡는 장사를 하느라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우선 신(新)조선 가격이 뛰고 있다. 14만7000㎥급 액화천연가스(LNG)선의 발주 가격은 지난해 2월 2억1500만 달러이던 것이 최근 2억3000만 달러로, 6500 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한 개 적재량)급 컨테이너선은 같은 기간 9100만 달러에서 1억600만 달러로 뛰었다. 덩달아 중고선 시장도 호황이다. 올 들어 새 배 발주가보다 5년 된 중고 선가가 높아지는 경우가 생길 정도다. 삼성중공업 영업팀은 고부가가치 선종 위주로 상담을 하거나 계약 조건이 좋은 선주를 먼저 만난다. 올 들어 300여 척의 수주 협상을 벌인 결과 드릴십·FPSO(부유식 원유 생산·저장·하역 설비)·LNG선·초대형 컨테이너선 등 고가선 위주로 87척을 수주했다. 이현용 전무(영업실장)는 “올 들어 일부 또는 전액을 원화로 결제한 수주 계약이 두 건 있었다”며 “앞으로도 같은 조건이면 환 리스크를 더는 원화 결제 조건의 계약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다른 조건이 같으면 오래된 거래처 우선 원칙을 적용할 계획이다.

대우조선해양도 2012년 이후 인도분만 주문을 받을 정도로 조선소가 꽉 차 있다. 그래서 지불 조건을 따져 순서를 정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대개 배 한 척을 건조하면 배 값을 다섯 차례로 나눠 받는데, 계약 때 선수금을 많이 주는 회사가 좋다는 것이다. 대우조선 관계자는 “선수금을 많이 받으면 환 리스크를 더는 것은 물론이고 이자소득도 생긴다”고 말했다. 막강한 조선업계도 목에 힘을 주지 못하는 상대가 있다. 포스코·신일본제철과 같은 철강업체다. 최근 선박용 후판 값이 일제히 뛰었지만 후판 공급이 달려 불만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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