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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제1년>무엇이 어떻게 변했나-사채시장.비자금.증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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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 하나 「경제 주체」가 아닌 사람이나기관이 없다.금융 거래 하나 하나에 주민등록증을 대조해 기록을남겨놓는 「금융실명제」하나가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의식 전반에 두루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지난1년간 일어난 각 분야에서의 행태 변화는 앞으로 종합과세 등을거치면서 두고 두고 일어날 변화의 「序說」에 지나지 않는다.
실명제가 탄생시킨 私債시장의 新造語가「어음박치기」였다.
실명제 초기에 한동안 손을 놓았 던 사채업자들은 곧 自救策을강구하고 나섰는데 이 과정에서 어음할인을 요청하면 요청금액보다더 큰 어음을 주고 차액을 정산하는「어음박치기」와 국세청 명단통보를 각오하고 돈 많은 사람의 양도성예금증 서(CD)등을 싸게 할인해주는 수법도 등장했다.
그런가 하면 돈을 꾸는 사람에게「1회용」실명계좌를 만들게 한후 이 계좌를 이용,할인어음을 추심한 뒤 계좌를 버리는 등 실명제를 빠져나가는 방법이 보편화되기도 했다.
또「상식이하」의 후한 금리인 연 6~7%에 1천억원대의 자금을 꿔주겠다는 怪전화가 대기업 곳곳에 걸려왔던 것도 실명제가 아니면 상상도 못할 현상이었다.
많은 사채업자들이 어음할인 대신 개인 대상의 신용카드 할인이나 상품권 할인 등으로 전업(?)하기도 했다.
어쨌든 제도권 금융의 裏面에서 엄연한 자리를 차지했던 私債시장은 실명제 이후 거액 錢主들이 속속 이탈함에 따라 더이상「큰손」들의 무대가 아니라 이들의 표현에 따르면「중치」(중간 손)이하「잔챙이」들이 중소기업.영세기업과 개인을 상대 하는 무대로바뀌었다.
여기에는 대기업.중견기업 등 「큰 손님」들이 대출여력이 늘어난 제도권 금융기관 쪽으로 줄줄이 돌아선 것도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실명제 이후 사채업자들이 어음할인에 더욱 신중하다 보니 중소기업.영세상인에게는 사채시장이 더욱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 돼버렸다.
『실명제 이전이나 이후나 큰 차이가 없다.』 중견 상장 제조업체인 K社의 자금담당자는 實名制 이후에도 규모가 큰 비자금은예전이나 다름 없이 운영되고 있다고 잘라 말한다.
비자금을 조성하는 방법도 빌리지 않은 돈을 빌린 것처럼 해 회사돈을 빼돌리거나 구매계약을 하면서 실제 계약금액보다 높은 가격으로 계약서를 작성하는 방법 등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고 이 관계자는 덧붙였다.중견 건설업체 J건설의 자금 당담자도『실명제 실시 직후 드러내기 곤란한 자금처리가 문제였지만 임원이나경리담당직원의 개인명의로 실명전환을 했고 소액비자금 계좌는 하청업체에 공사대금으로 넘겨 별 어려움이 없었다』며『필요하다면 지금이라도 비자금을 만드는 일은 어렵 지 않다』고 밝혔다.
다만 경비 지출 패턴은 실명제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K사의 자금담당자는『예전에는 거래처 접대비용중 상당부분이 비자금으로 처리됐는데 요즈음은 대부분 법인카드를 사용한다』며『비자금의 대부분은 오너 개인용으로 사용되고 그런 만큼 관리가 더욱 은밀하다』고 말했다.
그간 각광받던 유상증자는 실명제 아래서「최후의 자금조달 수단」으로 밀렸다.
소액주주들에게는「생돈」을 쏟아 붓도록 하면서도 대주주들은 회사 돈을 빼내 신주청약을 한 뒤 적당히 주가가 오르면 신주를 팔아버려 지분율은 그대로 유지하고 빌린 돈도 갚던「好시절」의 유상증자 행태가 실명제로 된서리를 맞았다.
실명제 때문에 대주주들도 신주를 인수하는 자금의 출처를 투명하게 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해부터 기업 인수.합병의 우려가 높아지면서 자칫 유상증자를 잘못해 지분율이 뚝 떨어지면 회사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걱정이 대주주들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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