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책>떨어진 꽃은 줍지 않는다-김정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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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보이지 않는 것은 늘 실체보다 과장되거나 축소되게 마련이지요.「장님 코끼리 만지기」는 적절한 비유인것 같아요.우리에게 북한은 장님이 만지는 코끼리와 같은 존재였지요.컴컴했던 정치상황 때문에 본의 아니게 소경으로 지냈던 많은 사람 들이 제 소설을 읽고 조금이나마 개안의 희열을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북한 인민군 간호장교의 증언을 토대로 쓰여진 장편실화소설『떨어진 꽃은 줍지 않는다』(中央日報社刊)의 작가 김정섭씨(47)에게도 북한은 장님 앞에 버티고 선 코끼리였다.어릴때부터반공교육을 받고 자라온 그에게 북한은 늘 공포와 연민 의 대상이었다.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북한에 관한 풍문을 액면 그대로 믿진 않았지만 그의 손끝에 만져지는 코끼리는 여전히 그모습 그대로였다.
그가 소설의 주인공 이복순씨(62)를 만난건 92년2월의 일이었다.이씨는 중국으로 자기를 찾아온 한국기자 2명의 취재를 거부하고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아도 좋을 만한 작가를 찾기 위해방한중이었다.
『이씨는 처음 한동안은 절 경계하는 눈치였어요.그러다 어느 한순간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저에게 절을 하더군요.그리고는「자식들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이라며 자신의 증언을 있는 그대로 써 달라고 신신당부했어요.「그러겠다」고 얘 기하자 그때부터 술술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어요.』 이씨는 경북 흥해에서 태어나 10세때인 42년 가족을 따라 만주로 이주,14세의나이로 팔로군에 입대했다.여기서 3년간 간호교육을 받은 이씨는동료들과 함께 49년 차창을 모두 가린 열차에 태워져 함경북도나남으로 오게 된다.북한 에서 다시 평양간호학교에 입학한 이씨는 50년4월 육군소위로 임관되고 2개월후 전장으로 나가 압록강에서 낙동강전선까지 광기어린 역사의 현장을 고스란히 체험한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씨는 김일성주치의 간호군관으로 직접 김일성을 간호하는등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누렸으나 56년 남편백용성대좌가 숙청당하면서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이씨의 증언은 더도 덜도 말고 사람사는 얘기 그 자체였어요.전쟁의 와중에도 사랑과 미움의 감정으로 갈등하고,도망가는 의용군을 총살시키는 인민군이 있는가 하면 포탄이 떨어지는 가운데도 쓰러진 미군을 치료해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니 까요.20여일에 걸쳐 인터뷰를 하면서 코끼리의 실체가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그 코끼리는 코가 길고 뚱뚱하고 다리가 4개달린,동물원에서흔히 보는 그런 평범한 코끼리였지요.』 개안의 체험을 한 작가김정섭씨는 이씨와 헤어진뒤 방문을 걸어 잠궜다.그리고 2년간을역사의 현장에서 이씨와 동거했다.그 결실이 4권의『떨어진…』로맺혔다.이 소설은 지난달 발간 되자마자『인민군의 눈을 통해 6.25를 실체에 근접 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10만부 가까이 팔려나가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47년 부산에서 태어난 작가 김정섭씨는 울산현대중공업 조선설계실에서 10년간 근무하다 사업을 벌였으나 실패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그곳에서 목적했던 돈은 한푼도 못벌고 장편『먼바다 조각배』를 써서 귀국과 함께 발표했지만 이 역시 주 목을 받진 못했다.이번에 발표한『떨어진…』이 그의 삶을 뒤집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김씨는『문학적으로 뛰어나다는 생각을 하진 않는다』면서『다만 북한을 구원의 대상이나 박멸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소설이 읽혀져 북한을 화해와 동반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목소리를 낮춘 다.
〈南再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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