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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라의KISS A BOOK] 겉만 조숙한 나약한 아이들 '치열한 삶의 이야기' 어떨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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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로빈슨 크루소는 어린이들의 영웅이다. 미셸 트루니에가 로빈슨 크루소의 제국주의 시각을 비틀어 패러디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민음사)을 써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애들은 그런 거 아랑곳하지 않는다. 학교와 학원을 뱅뱅 도는 아이들에게 매혹적인 푸른빛이 깜빡이는 비상구 같은 존재가 간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홀로 생존’의 모험이 현실 속으로 차입된다면? 사람이 없어서 고독한 게 아니라, 사람 때문에 뼈 시리도록 고독한 공포에 사로잡혀 살아야 한다면?

우리 오를레브의 『희망의 섬 78번지』(비룡소)는 머나먼 섬 이야기에 신나기만 했던 아이들을 오싹한 생존의 몸부림, 그 생생한 역사의 현장 속으로 안내한다. 꿈이 아니다. 판타지도 아니다. 현실이다. 알렉스는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언제 죽임을 당할지 알 수 없다.

크루소는 누군가 무인도를 찾아주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78번지 폐허 더미에 홀로 던져진 알렉스는 누군가에게 발각될까 봐 매 순간이 두렵다. 친구라곤 생쥐뿐이다. “녀석이 쥐라는 게 다행스럽다.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할 수 있으니까.”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말 한마디가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현실을 표현할 수는 없다. 결국 알렉스는 정당방위의 살인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작가는 꿋꿋하게 그곳이 ‘희망의 섬’이라고 주장한다. 처음에는 불운의 숫자로 생각되던 13을 어떻게 행운의 숫자로 여기게 되었는지, 그 이면에 희망의 비밀이 숨어 있다.

게리 폴슨의 『다리 건너 저편에』(사계절) 또한 소름 돋는 삶의 치열함 속에 던져진 소년의 이야기이다. 작가의 삶이 거칠었듯 이 이야기 또한 그렇다. 짧고 무뚝뚝한 작품의 어느 결에 눈물이 배어 있었을까. 마지막 장을 덮고 난 손이 축축해진다. 그리고 자꾸만 작가에게 묻고 싶어진다. “그래서 마니는 어떻게 되었나요?” 대답이 없어도 독자들은 마니의 행복을 믿는다. 희망이란 그런 것이다.

두 작품은 막연하고 허황된 소망 대신, 현실을 직시한 강인한 의지력, 그 속에서 분출된 치열한 생존에의 열망만이 진정한 희망으로 인도하는 등대가 된다는 ‘스톡데일 정신’을 가르쳐준다. 인터넷 덕분에 조숙해졌지만, 실상 엄마의 지시 없이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요즘 아이들! 먹빛 현실을 헤쳐 나가는 핏빛 모험 이야기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대상 연령은 로빈슨 크루소 그 너머의 모험에 목마른 13세 이상의 소년소녀와 진정한 모험은 삶의 갈피갈피에 숨어 있음을 가르쳐 주고픈 엄마들.

임사라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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