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10년의 성적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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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27면

올해는 아시아 금융위기 10주년이다. 이를 재조명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수많은 회의가 열렸다. 필자도 이 분야를 연구해 왔기 때문에 여러 회의에 참석했다.

어딜 가건 필자는 소수의견이다. 다수의견은 한국이 IMF프로그램이라는 쓴 약을 잘 삼키고 구조조정을 철저히 했기 때문에 가장 성공적으로 금융위기를 극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이 다른 나라들보다 빨리 회복한 가장 큰 이유는 ‘과잉 투자’라고 비난받을 만큼 투자를 많이 해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상태에서 세계 경제가 좋아지니까 따라서 회복한 것이다.

한국과 같은 시기에 금융위기를 당했지만 IMF 처방을 거부했던 말레이시아와 비교하면 잘 알 수 있다. 말레이시아도 1998년 하반기부터 빠르게 회복됐다. 세계 경제가 공황 위기에 몰리면서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공격적으로 금리를 인하하던 때였다. 한국·태국·말레이시아 등 금융위기 국가들도 함께 금리를 대폭 낮추며 경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회복기에 말레이시아의 성장률이 한국보다 낮은 것은 ‘구조조정’을 덜 해서 그랬다기보다는 금융위기 전에 투자를 덜 했기 때문이다. 또 금융위기 전 말레이시아의 성장률은 한국보다 낮았다. 과거에 투자도 많이 했고 성장률도 높았던 나라가 회복기에 성장률이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 경제는 현재 아무리 점수를 잘 줘봐야 B학점 학생이다. 성장률이 4~5%에 불과하고 투자가 위축돼 있다. 주식시장이 대망의 2000 고지를 넘었다고 하지만 실물경제는 따로 논다.

그런데 IMF프로그램을 재조명할 때면 흔히들 한국 경제가 과거에 C학점 학생이었는데 프로그램을 잘 따른 결과 B학점 학생이 된 듯 얘기한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금융위기 전엔 최우등생 중 한 명이었다.

금융위기가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우등생을 열등생으로 비하해서는 안 된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은 뉴욕시장에서 출발했다. 대공황이 났다는 사실만으로 미국 경제가 20년대에 문제투성이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필자가 IMF프로그램에서 가장 안 좋게 생각하는 부분은 고금리·구조조정 등으로 국내자본을 꽁꽁 묶어놓은 다음에 외국자본이 들어와 알짜 자산들을 헐값에 산 것이다. ‘투자자 신뢰 회복’이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삼성전자·포스코·국민은행 등 한국의 대표적 기업이나 은행들의 외국인 소유 비중은 60~80%까지 높아졌다. 주주 구성으로만 보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외국인 비중이 높은 나라 중 하나가 됐다.

필자가 이런 얘기를 하면 많은 분이 “왜 학자께서 음모론에 동의하느냐”고 지적한다. 그러나 ‘음모론’이 담고 있는 내용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다. 금융위기 때 긴급자금을 지원하는 주체는 선진국과 선진국 금융기관들이다. 왜 이들이 공짜로 돈을 주겠는가. 돈을 지원하는 대가로 향후 사업을 벌이고 이권을 따는 데 편한 방향으로 여건을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 당시 한국 지도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멍청했는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알더라도 선진국과 IMF가 워낙 세게 밀어붙이니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김대중 정부는 ‘IMF 플러스’라 불릴 정도로 IMF가 요구한 것보다 강력한 구조조정을 수행했다. 여기에는 DJ가 과거 경제 운용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지도자였다는 사실도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DJ와 클린턴의 돈독한 관계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미국은 햇볕정책에 절대적 지원을 보냈다. 미국에 ‘퍼주기’를 한 뒤 대북문제 지원을 끌어내는 딜(deal)이 있었다고 추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후 이 딜은 안타깝게 공염불이 됐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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