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에디터칼럼

착한 은행, 나쁜 은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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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착한 여자 콤플렉스’라는 게 있다. 여자는 착해야 한다는 사회의 요구에 짓눌리는 심리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한때는 이런 현상이 꽤나 번졌다. 하지만 여성들의 사회적 성취가 쑥쑥 올라가는 요즘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말이 됐다.

그런데 다른 착한 콤플렉스는 여전히 힘을 떨치고 있다. 경제는 착해야 한다는 ‘착한 경제 콤플렉스’다. 경제가 착해야 한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경제가 뭔가. 한마디로 돈을 버는 일이다. 여기서 선행을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돈을 벌 때는 악착같아야 한다. 그래야 모이는 것이 돈이다. 착함은 그보다 한참 뒤다. 곳간이 차야 인심도 생겨난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 회장은 컴퓨터 운영체제(OS)인 윈도를 팔아 떼돈을 번다. 그 결과 현재 재산이 거의 60조원으로 14년째 세계 1위 부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는 윈도의 소스를 공개하라는 업계와 네티즌들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세계 OS시장의 약 90%를 장악하고 있다. 장사를 할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쓸 때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게이츠 회장은 세계적인 자선사업가이기도 하다. 게이츠 부부는 두 사람의 이름을 딴 ‘빌 & 멜린다 재단’을 통해 한 해 수억 달러를 빈국의 의료·교육사업에 투입하고 있다. 독점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번 돈을 이렇게 의미 있게 쓰는 것이다.

미국 뉴욕에는 유대인이 많이 산다. 뉴욕에 사는 외국 주재원들에겐 이런 바람도 있다. 집주인이 유대인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대인들은 자기 집에 뭐 하나 잘못돼도 세입자에게 책임을 묻는다. 10개가 잘못됐는데도 15개 또는 20개의 잘못을 뒤집어씌우는 일도 있다. 세입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주인이다. 이렇게 악착같은 유대인들이지만 지역사회에 기부를 가장 많이 하는 이들 또한 그들이다. 이른바 '개 같이 벌어 정승 같이 쓰는 것’이다.

돈을 벌 때는 그냥 버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이 영역에 착하거나 나쁘다는 기준이 적용돼선 안 된다. 이익 창출이 으뜸가는 목표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 주변에선 아직도 이런 기준이 흔들리곤 한다. 월급통장의 이자를 놓고 요즘 국내 1, 2위인 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이 착하지 않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근로자들의 월급통장을 관리하면서 이자를 거의 쳐주지 않는 걸 두고 하는 말이다. 금리가 연 0.1~0.2%라고 하니 공짜나 다름없다. 이런 돈을 연 6~7%의 이자로 대출하면 은행의 돈벌이는 아주 짭짤하다. 증권사들까지 나서 월급통장을 유치하려 애쓰는 이유다. 증권사의 공세에 은행들도 반응하기 시작했다. 하나은행과 우리은행은 월급통장에 들어온 돈이 일정액을 넘으면 초과 부분에 대해 연 4~5%의 이자를 쳐주며 고객을 붙잡고 있다.

이자를 후하게 주는 은행을 착한 은행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월급통장의 이자를 거의 주지 않는 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을 나쁘다고 비난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리딩 뱅크가 월급쟁이들의 쥐꼬리 월급으로 돈놀이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은행 영업은 싼 자금을 끌어와 비싸게 굴리는 것이 기본이다. 이런 은행에 돈장사를 한다고 비난하는 건 은행 셔터를 내리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합법적인 돈놀이를 보장받은 은행에 그걸 하지 말라고 요구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대응 방법이 있다. 아주 간단하다. 떠나는 것이다. 월급통장에 이자를 높이 쳐주는 금융회사로 가면 그만이다. 그게 소비자들의 정당한 응징이다. 고객들이 떠나 영업에 차질이 생긴다 싶으면 그 은행들은 당연히 무슨 수를 낼 것이다. 수익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는 것이다. 다른 절이 없으면 곤란하지만 요즘은 널려 있는 게 절이다. 착하지 않은 은행을 향해 “착한 은행이 돼라”고 떠들 필요가 없다. 그냥 떠나면 된다. 그게 경제를 아는 소비자의 행동이다.

심상복 경제부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