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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승계 金正日은 누구인가-81년부터 권력 전면에 부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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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42.2.16 구소련 브야츠크 혹은 사마르칸트 출생說(북한은「백두산밀영」으로 주장 ▲45 말 입북 ▲54.8 평양제4인민학교 졸업 ▲57.8 평양제1중학교 졸업 ▲60.8 남산고급중학교 졸업 ▲64.3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정치경제학부) ▲64 당조직지도부 지도원 ▲66.9 호위총국 호위과 근무 ▲71당선전선동부 부부장겸 문화예술부 부부장 ▲73.9 당 조직및 선전선동 담당비서 ▲74.2 당중앙위 정치위원(「후계자」결정)▲80.10 당정치국 상무위원.비서.군사위원 ▲90.5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91.12 인민군 최고사령관 ▲92.4 원수 칭호 ▲93.4 국방위원장 金正日은 金日成의 장남이자 북한정권의 차기지도자다.김일성의 뒤를 이을「미래의 수령」인 셈이다. 그는 1942년 2월16일 蘇聯嶺인 하바프스크 근처의 브야츠크야영소에서 태어났다(북측은 白頭山密營으로 주장).해방후 귀국한 그는 49년9월 어머니 金貞淑을 잃는다.
한국전쟁때 잠시 中國 吉林에 피난간 적이 있고 국민학교를 몇차례 옮긴 뒤 평양제4인민학교를 졸업했으며 평양제1초급중학교.
남산고급중학교를 거쳐 60년9월에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입학했다.
金正日이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던 1964년 봄부터다.이때부터 그는 北韓 정치무대의 중심인 당중앙위원회에 배속되어 조직지도부.선전선동부의 지도원.책임지도원.과장.부부장 등을 거치게 된다.
그가 권력의 核에 해당하는 노동당 조직담당비서를 맡은 것은 73년 9월이며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이 된 것은 74년 2월이다. 그가 권력핵심부에서 일하기 시작한지도 이미 20년이 넘었다는 얘기다.현재 金正日은 黨부문에서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비서.군사위원회 위원직을 맡고,政府부문에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議會부문에서 최고인민회의대의원,軍부문에서 최 고사령관을 각각 맡고 있는 명실상부한 권력 2인자다.그는 67년 5월의 당중앙위원회 4기 15차전원회의를 계기로 선전부문에 대한 지도를 본격화했다.주로▲金日成혁명역사연구실 체계의 개편▲혁명전적.사적지 정비▲예술부문에서의「혁명전통」표 현의 철저 등에 주안점을 둔 것이었다.
70년대초 그는「피바다」「한 자위대원의 운명」「꽃파는 처녀」등 중요한 영화.가극제작을 지도했으며 가극대본을 직접 쓰기도 했다고 한다.
北韓의 문화.예술계 종사자는 현재 그의 지도방침에 따라 창작활동을 하며 그의 저작『영화예술론』은 문예.예술활동의 지침서로꼽힌다. 한편 金正日은 정치위원 취임직후부터「온사회의 김일성주의화」를 목표로 이데올로기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이 활동을 계기로 그는 선전부문을 거의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또 金正日은 70년대 중반에 경제부문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조직적으로는 3대혁명소조 및 소조지도 당기관,동태적으로는「속도전」「70일전투」「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을 지도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군지휘권을 갖고 있으며 金日成 有故때 인민군을 비롯,사회안전부 산하의 인민경비대.민병조직인 노농적위대등北韓의 모든 군사조직을 지휘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다.
정치지도자로서의 金正日의 특징을 들면 우선 군중을 발동하는 運動戰.速度戰방식을 위주로 하며 혁명1세대에 비해 정력적으로 일한다는 인상을 주려고 애쓴다는 점이다.
현지방문활동은 金日成의 트레이드 마크지만 金正日은 80년10월 6차당대회에서 후계자로 확정된 이래 81년5월의 平北 妙香山지구 건설현장을 시발로「實務指導」부문을 확대해왔다.그의 실무지도에는 黨정치국 위원,政務院의 총리,부총리,부왠 들이 수행한다. 그는 80년대의 실무지도에 앞서 70년대에 이미「3대혁명소조운동」의 현장감독을 위해 北韓전역을 순회했었다.
***국제기류 민감 그리고 金正日은 혁명1세대에 비해 국제기류에 민감하여 선진과학기술의 발전과 도입,주민생활의 향상에 큰관심을 기울여왔다는게 北측의 주장이다.그는 84년2월 당중앙위책임간부협의회를 소집해 인민생활향상에 관한 연설을 한 바 있고그 해 8월 8.3인민소비품생산운동을 발기해 주민생활 전반의 개선운동을 전개하기 시작,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밖에 김정일 통치스타일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른 특징은 회유.환심책을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이나 집단이 생산성과.연구성과를 올렸을 때,간부들의 중병때,노동자.농민들이 일하다가 災害로 사고를 당했을 때등 이런저런 계기가 있을 때면 선물공세로 민심을 잡는 방식을 즐겨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金正日은 金日成의 노선을 계승해「우리식 사회주의」를 계속 강조해온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다.그가 강조해온「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온 사회를 주체사상화하자!」「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식으로!」등의 정치슬로건에서도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북한은 김일성의 사망전부터 이미 김정일시대라고 할수 있다.
북한에서 김정일 지도체제가 형성된지는 놀랍게도 20년이 넘었다.그가 권력핵심부에서 20년 이상을 보낸 사실은「김정일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북한에서 유일사상체계가 강조되기 시작한 뒤인 60년대말부터 70년대초에는 노동당내에서 「유일적 지도체제」라는 이름아래 당중앙에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벌어졌다.이 무렵 김정일은 당중앙의 선전선동부문과 조직부문에서 일하면서 이를 주 도했다.
***74년 후계내정 그가 정치적으로 부상한 중요한 계기는 73년9월의 당 5기 7차전원회의와 74년2월의 8차 전원회의였다.전자는 그가 당 조직.선전선동담당 비서로,후자는 정치위원으로 선출됐던 회의다.그리고 김정일은 일찌감치 74년 2월에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됐다.물론 이 과정은 당시에는 베일에 가려졌었다.김정일은 74년부터「당중앙」이란 신비스런 이름으로 불리면서 북한의 모든 권력을 당중앙으로 집중시키고 그 속에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권력전면에 부상한 그가 공개된 것은 80년 6차 당대회때다.적어도 6년간은 권력주변을 정리해야 했다.그 과정에서 김정일 지도체제.후계체제에 반발한 지도자는 도태되었다.74년이래「영광스러운 당중앙」으로 불리던 그는 81년 6 월부터「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로 불리기 시작했고 오늘까지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왜 김일성 사망전부터 김정일이 북한의 실권자였는가.
첫째,북한의 모든 부문은 당이 장악하고 있다.「당지배」국가인것이다.김정일은 바로 노동당을 쥐고 있다.
노동당에선 중앙의 정치국과 비서국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데 그는 정치국상무위원이자 조직비서다.그는 당서열 2위로 김일성을대신해 정치국과 비서국을 총괄지도하고 있다.
둘째,모택동이 말했듯이「모든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북한에서 총구를 쥐고 있는 지도자도 김정일이다.
셋째,사회주의나라에서 권력은 이데올로기로부터 나온다.북한도 예외가 아니고 김정일은 사상.이데올로기 부문을 장악,독점하고 있다. ***인사권도 한손에 그는 당의 선전선동부문을 완전히 장악하여 북한의 모든 매스 미디어를 쥐고 흔든다.이념해석.사상선전.노선결정.정보독점이 모두 그의 몫이다.주체사상을 만들었다는 김일성을 빼면 그는 사상방면의 최고지도자다.
넷째,권력은 인맥장악에서 나온다.북한도 예외가 아니다.현단계북한의 권력핵심은 대부분 김정일의 정치적 부상과 궤를 같이해왔다. 70년대에 이미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김정일은 당.정.군의 인사권을 쥐고있고 자기 사람을 앉히는 추세는 가속화되고 있다.특히 그는 73년부터 시작한 3대혁명소조운동을지도하면서 자신과 같은 세대 인물들을 물색,권력의 중추부에 배치했으며 이를 통해 간부세대교체를 진행했다.
북한은 수령-당-대중이 한묶음이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체제다.수령의 사상과 의지를 관철시키는 활동을 하는게 당인데 당을 김정일이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앞으로 수령이 될 준비를 완전히 끝내놓은 상태다.
〈兪英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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