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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자금 땅으로 몰린다] 규제 비웃는 투기꾼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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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토지거래허가를 받아낼 방법은 많습니다. 걱정 말고 돈만 갖고 오세요."

지난 주말 경기도 평택에서 만난 A중개업소 사장은 토지거래허가구역인 이곳에서 외지인도 투자 목적으로 1천평 정도의 농지를 살 수 있느냐고 묻자 거침없이 답했다. 그는 "최근 농지나 임야를 살 자격이 없는 서울과 분당지역의 투자자 3명에게 땅을 사줬다"고 자랑했다.

그래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토지거래 허가 문제를 전담하는 '해결사'를 소개해 주겠다며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정부가 투기를 막는다고 전 국토의 15%인 46억평을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묶었지만 투기꾼들은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규제 비웃는 투기 수법=지난해 여름 경기도 용인의 관리지역(옛 준농림지)의 밭 5백평을 계약한 서울지역 거주자 B씨. 그는 토지거래 허가를 두번이나 신청했는데도 허가가 나지 않자 궁리 끝에 지난해 말 무상증여 방식으로 거래를 위장한 뒤 땅을 취득했다. 땅을 무상으로 증여할 때는 규모에 관계없이 토지거래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세금(증여세)이 양도소득세보다 5백만원 더 나왔지만 B씨가 부담하기로 합의해 해결했다.

용인의 T공인중개업소의 한 관계자는 "요즘 수도권과 충청권에서 증여를 위장한 매매가 성행하고 있다"며 "이런 방법은 초보자들도 이용할 정도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지난 한 해 동안 충북 청원군에서 명의가 바뀐 땅 5필지 가운데 1필지꼴이 증여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말 경기도 화성에서 임야 1천평을 매입한 서울지역 거주자 C씨는 이 지역이 2002년 11월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되기 전에 매매한 것처럼 소급계약서를 작성한 후 명의이전 소송을 통해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토지거래허가구역에서 임야는 세대원 모두 해당 지역으로 주소를 옮긴 뒤 6개월 이상 거주해야 허가가 난다.

하지만 그 이전에 매매한 것으로 꾸밀 경우 이 요건을 비켜갈 수 있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화성의 한 중개업자는 "명의이전 소송을 하면 법원에서 출석통지서가 나오는데 매도자가 계속 불응할 경우 매수자가 자동 승소하게 된다"며 "법률적인 지식이 많은 고수들이 이런 방법을 이용한다"고 전했다.

충청권 등지에선 토지를 허가 기준 이하로 쪼개 원주민(주로 농민)에게 명의신탁한 뒤 외지인에게 되파는 방법이 쓰이고 있다.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된 뒤 분할한 토지의 경우 첫 거래는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두번째 거래부터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토지거래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는 법원 경매를 이용하는 경우도 흔한 수법이다. 시세의 1.5~2배 정도로 근저당이나 가압류를 설정한 뒤 경매에 부쳐 낙찰받는 방식이다. 청원군의 한 중개업자는 "법원 경매를 통해 소유권을 넘겨받을 경우 기간이 6개월 이상 걸리기 때문에 규모가 큰 토지를 거래할 때 흔히 이용된다"고 전했다.

최근엔 다소 줄었지만 위장 전입을 통한 불법 거래도 여전하다. 토지거래 허가 신청 전에 주소지를 옮긴 뒤 허가를 받으면 한달도 안 돼 다시 전출하는 식이다. 요즘은 단속이 심해지자 공무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전입 기간을 늘리기도 한다. 주소지를 옮길 친인척이 없는 경우는 월세를 들거나 싼 전세방을 구한 뒤 최소한의 세간살이만 갖춰 놓고, 문을 잠가 놓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해 12월 청원군에 허가 신청된 6백90여건 중 19건이 위장 전입으로 밝혀져 허가가 나지 않았으며, 평택시도 지난 한 해 위장 전입 건수가 40건에 이르렀다.

◇허술한 단속.제도=투기꾼들이 설치고 있지만 관할 지자체는 행정력이 달려 이를 제대로 단속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김포시의 경우 한달 평균 6백여건의 토지거래 허가 신청이 접수되지만 담당 공무원은 고작 두명이다. 김포시 관계자는 "하루에도 30건씩 허가 신청이 들어와 실사작업은커녕 서류를 검토하기도 벅차다"고 말했다.

단속에 걸린다 해도 처벌 규정이 약해 투기꾼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땅값이 그 이상으로 올라 벌금을 내더라도 남는다는 계산이다. 경기도 오산의 한 중개업자는 "불법 거래를 하다가 적발될 경우 공시지가의 30%에 이르는 벌금을 내야 하지만 이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양도세 등 세금부담이 지나치게 가볍다는 점도 투기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토지거래허가구역에선 농지 등을 1년 이상 보유할 경우 시세보다 크게 낮은 공시지가로 양도세를 내면 되기 때문이다.

박원갑.서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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