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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에서>韓.佛시인 뜨거운 만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이 땅에 살고 있는 시인 한 명과 멀리 프랑스에서 온 시인 한 명이 만났다.두 사람은 시에 대해 긴 시간 얘기를 나눴다.
비록 서로 쓰는 말은 달랐어도 마음으로 주고 받은 그들의 대화는 뜨겁고 진지했다.
지난 16일 오후5시 경복궁 초입에 자리 잡은 프랑스문화원.
한국시인 高銀씨(61)와 프랑스시인 알랭 주프르와(66)가 시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한국시인이 먼저입을 열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첫날밤의 순결을 바치는 존재 전환의 진통입니다.』 초로의 시인은『항상 새로 시를 쓸 때마다 영혼의 심연에 남아 있는 마지막 童貞을 쏟아내는 심정으로 시를 쓴다』고고백했다.통역을 통해 전달되는 언어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시인의 詩論 강연이 계속되는 동안 프랑스시인은 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프랑스시인은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느꼈던 낯섦과 몰이해를「이마주」(image)를 통해 극복했던 자신의 체험을 소개했다.『시를 쓴다는 건 이마주를 통해 세상과 자신을 연결시키고,둘사이에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라고 그 시인은 설명했다.이미 한국을 10여차례나 방문한 그는 한국시에 대해서도 일정한 이해를갖고 있다고 말했다.『증오를 뜻하는 프랑스어「엔」(haine)과 한국어의「恨」사이에는 일맥상통하는 정서가 있다』며 눈에 보이는 현실에 대한 거부와 분노를 초극할 때 진정한 의미의 시가탄생할 수 있을거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두 시인이 자리를 함께 하게 된 배경에는 그림이 있었다.두 사람 다 在佛화가 林世澤씨(47)의 누드화에 푹 빠져 있다.
목탄을 사용한 林씨의 대담한 누드데생은 두 시인에게 시적 영감의 원천이 되어 둘을 이어주는 끈이 됐다.한 때 화가를 꿈꾸었던 한국시인과 미술평론가를 겸하고 있는 프랑스시인의 만남은 그래선지 더욱 허물없어 보였다.
「오,내 육체의 소멸이여/거기에 세우고 싶어라/내 하늘 속의푸른 기쁨으로」.
林씨의 누드화를 보고 이렇게 노래 한 이는 한국시인이었다.
「모든 섹스를 바라보며/내가 과연 누구인가 질문할 때/여자라는 他者는 무엇인가…쓰리도록 아픈 이 생생한 도전」(알랭 주프르와.「너에게,누드에게」).
林씨를 가리켜 극동에서 여자의 육체를 가장 명석하고 공정하게다루는 화가라고 극찬한 프랑스시인은 林씨의 누드화를 소재로 이미 여러편의 시를 발표했다.이달말까지 미사화랑에서 계속되는 林씨의 전시회에는 그의 누드데생 14점이 전시되고 있다.
장르를 초월해 시와 그림이 만나고,언어와 문화를 뛰어넘어 시와 시가 만난 초여름 저녁은 예술의 위대성과 초월성을 확인하는정겨운 시간이었다.
〈裵明福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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