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INSIDE PITCH PLUS <28> 김경문 감독 성공 뒤엔 ‘의심의 미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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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 15면

“자~. 이젠 굳이 승부할 필요가 없죠.” 해설자의 목소리에 확신이 넘쳤다. “이젠 거르고 가는 게 정석입니다. (누를) 채우고 가서 병살타를 노려야죠.”

그랬다. 0-0으로 팽팽히 맞선 9회말 1사 3루. “아차” 하면 승부가 끝나는 상황이었다. 지난 18일 두산과 LG가 맞선 잠실구장. 마운드의 이승학(두산)이 타석의 손인호(LG)를 노려보고 있었다. 해설가도 아나운서도, ‘당연히’ 이승학이 1사 만루를 만들어 놓고, 병살타를 유도하려 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실제로 지난 8월 28일 잠실 롯데-LG전에서도 그랬다. 연장 12회말 1사 3루에서 롯데 카브레라는 최동수와 박용택을 고의 볼넷으로 걸러 만루를 만든 다음 손인호를 상대했다. 습관적으로 대부분이 수긍했다. 그게 ‘정석’으로 통했다.

그러나 그 ‘정석’에 반기를 든 의견도 있었다. 제 아무리 당연하게 보이는 선택도 상황에 따라 다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김인식 한화감독이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만루 채운다고 병살타 나오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지금 투수가 어떻고 타자가 누구냐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며 ‘습관적 정석’에 기대는 것은 소극적인 작전이라고 주장했다.

자. 다시 잠실로 돌아가서. 볼카운트 1-3. 해설자도 아나운서도, 타석의 손인호까지 그 다음 공은 스트라이크가 아닐 것이라고 예상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승학은 스트라이크를 던졌다. 중계팀은 그때까지도 “유인구로 승부를 걸어 말려들지 않으면 걸러 내보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도 이승학의 공은 정면승부. 깜짝 놀란 손인호가 간신히 걷어내 파울이 됐다. 이쯤 되자 ‘만루를 채우고 병살타를 노릴 것’이라는 예상은 꼬리를 감췄다. 이승학은 그 다음 공으로 헛스윙 삼진을 유도, 위기에서 벗어났고 후속 조인성마저 삼진으로 잡아내 9회말을 무실점으로 넘겼다.

‘정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한 뒤 정면승부를 편 두산 김경문 감독의 반론은 이렇다. “그 상황에서 만루를 채우면 투수가 선택할 수 있는 구종의 폭이 줄어든다. 만루가 주는 부담 때문에 위축될 수 있고, 밀어내기의 위험도 있다. 차라리 편하게 승부를 거는 게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

김 감독은 연장 10회초 또 한번 ‘정석’을 무시했다. 그는 이종욱의 2루타로 만든 무사 2루에서 ‘당연히’ 희생번트로 1사 3루를 만들 것이라는 ‘정석의 예상’을 깼다. 다음 타자 김현수는 번트모션을 취하지도 않았다. 김현수는 풀카운트 끝에 2루 땅볼을 쳤고 주자를 3루로 보냈다. 김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번트를 대서 주자를 3루에 갖다놓고 싶었지만 김현수는 번트를 잘 대는 타자가 아니다. 대타를 쓸까 생각했지만 김현수에게도 그런 상황을 풀어나가는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었다.”

그날 두산은 1-0으로 이겼다. 김 감독은 “두 번이나 정석을 무시하고 모험을 걸었는데 운이 좋아 이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감독의 선택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교훈을 준다.

우리가 ‘정석’이라고 무심히 받아들이는 세상의 ‘당연한 일’들은 발전을 정체시키는 안일함이 될 수 있다는 것. 사과가 떨어질 때 ‘왜?’라고 의심한 뉴턴이 잘 보여준 그 ‘의심의 미학’. 그게 김경문의 성공, 두산의 성공을 이끄는 비결이라는 메시지를. 네이버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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