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문제 현주소/응징=승리로 생각 말아야(시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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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IAEA 북한실체 파악 미흡/불신씻고 새선례 만들 차선책을
북한 핵문제와 씨름해 온 한국과 미국 및 국제사회는 그동안 여러차례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겨 왔으나 지금과 같은 긴박한 상황은 모두에게 새롭고 곤혹스럽기만 하다. 북한에 대한 제재 이외에 다른 묘수가 없는듯 보이는 상황에서 닥쳐올 미래에 앞서 북한 핵문제와 관련된 몇가지 문제들을 일단 냉정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북한의 핵개발 의도다. 북한은 핵을 협상 카드로 활용하며 자신이 처해 있는 외교적 고립,경제적 이국,국내 혼란시 외부세력의 개입 억지와 주민 단속의 수단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지난날 북한의 행태를 보면서 우리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확인하였다.
둘째,북한의 핵개발 현황이 모든 대북정책의 근간이 됨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첩보와 능력을 총동원해서도 아직 그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 이유는 1차적으로 북한의 비협조적인 자세 때문이지만 정상적인 사찰을 통해서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수준을 정확히 밝혀내기란 결코 쉽지않다.
셋째,우리에게 한미공조와 국제적 협조체제가 문제해결에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지만 여지껏 가동되어온 공조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우리의 기대에 미흡한 감이 없지 않다.
넷째,핵문제든 기타 남북관계와 관련된 사안이든 대북협상의 기초인 북한지도부의 사고체계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불완전하기만 하다. 유사종교 집단의 성격을 가진 신정체제 북한의 행태가 항시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은 아니었음을 지난 40년의 경험에서 우리는 확인하였다.
다섯째,북한이 지난 한해 핵무기 개발을 위한 시간을 벌면서 국제사회를 잘 요리해왔다는 주장도 있지만 북한의 전술적 성공이 전략적인 성과로 이어진 근거를 아직 발견할 수 없다. 북한의 딜레마는 자신이 핵개발을 통해 얻으려는 대가가 체제안정에 궁극적인 도움이 안된다는데 있다. 즉 북한의 선택은 최악의 경우와 최악 아닌 차선책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현재의 급박한 상황으로 돌아와 볼때 국제사회의 선택도 북한의 고민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더 나은 대안이 아니라 덜 못한 경우를 택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동안 국제사회가 핵무기 보유사실을 시인도,부인도 하지않는 이스라엘이나 핵무기를 보유한 파키스탄의 경우에서 보여준 행태를 감안할 때 이같은 상황은 예외라기 보다 오히려 선례를 좇고 있을 뿐이다.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힌 국제사회의 집단적 조치에 쾌도난마식의 명쾌한 해결책이란 없으며 북한 핵문제처리에도 유일한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상황에서 북한지도부의 현실인식과 계산에 영향을 미쳐 북한의 태도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제재논의는 분명 의미가 있다. 또한 실질적 제재가 작동하기 이전에 북한의 행태를 본뜬 미국식 「벼랑끝 전략」이 성과를 거둘 여지도 있다.
그러나 이같이 비교적 다행스러운 사태는 북한 지도부의 결정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가 과거의 입장과 전례에 따른 문제해결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선례를 만들수 있다는 유연한 사고를 가질때 비로소 가능하다. 북한 핵문제는 한국과 미국에,또한 IAEA에 있어서도 과거의 예를 있는 그대로 적용하기엔 독특하고 새롭기만 하다. 선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문제해결의 정답(?)에 근접하는 방법이라는데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서의 난맥상이 서서히 정리되어 가고 있다. 중국·일본·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경험한 바,지역의 특수성에 대한 미 행정부의 인식이 북한의 경우에도 적용될 필요가 있다. 언급한 나라들과는 달리 북한이 형편없는 범법집단과 같은 존재라는 뿌리깊은 불신감을 버리지 않은채 대북응징을 클린턴 행정부 대외정책의 첫번째 외교적 승리로 치부하려는 미국의 시도는 엄청난 대가를 수반하게 될 것이다.
한미공조체제에 큰 믿음을 갖고 주변국의 지지 확보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우리 정부의 시련도 북한과 마찬가지로 최악의 상황과 차선의 대안 가운데 선택해야하는 「분단국의 운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와 북한 모두 최악의 선택이 아닌 현실적인 차선책을 모색하는 정부의 균형된 노력을 국민앞에 보여주길 기대할 뿐이다.<길정우 민족통일연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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